[박상설의 자연속으로] 나의 방랑처는 산과 들, 대자연과 우주
[아시아엔=글·사진 박상설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캠프나비’ 대표]
“내 욕망은 호시탐탐 여행을 노리는 떨림”
너무 늦은 건가. 한해는 다 갔습니다.
말 못하고 몸으로 솟구치는 저 숲은 얼마나 자족한 것인가.
그네들의 새싹 앞에 다시 설렘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여행은 혼자서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모를 쏘다닌 풍경을 전합니다.
‘왕 늙은’ 기자의 세모풍경
아라뱃길 습지 억새 밭을 넘실대며 밀려오는 낙조….
호젓한 들녘을 걸으며 붉게 사방을 휘감아오는 노을 앞에 섰습니다.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일몰은 쓸쓸하고도 장려합니다. 바람과 들녘과 물과 나지막한 산 그리고 억새와 갈대숲에 머물러 나를 봅니다.
강인지 바다인지 운하인지 한줄기 평화를 이끄는 물줄기는 넉넉합니다. 뱃길 위에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길을 떠나면 물을 만나고 바람을 만나지만 여간해선 만나기 어려운 그리움의 겨울 물안개, 꿈결 같습니다. 한 편의 시가 빚는 또 다른 풍경…. 寒天의 日沒이 왜 이리도 시린가요.
춥고 허기지고 어렸을 때의 걸음과 마주합니다. 해질녘의 하루가 닫히는 소멸과 끝의 세월이 구십년이나 흘렀습니다. 아득한 삶을 보듬으며 가물가물 살팍하게 잘 살아온 할아비입니다. 가슴속에서 또 한 사람의 내가 태어나듯 여든아홉의 왕 늙은 기자로 말입니다.
긴 세월의 흔적을 찾아 늙은 기자는 독자 여러분에게 추억을 실어 나릅니다. 늙은이로 살면 안 된다는 다짐으로 희망과 더 아름다운 삶의 글을 전하려고 안달걱정 입니다. 한겨울인데도 싱그러운 땀이 송송 맺히는 걸음은 작은 꿈으로 가득합니다.
늙은 기자의 기쁨은 자연의 시노(侍奴)로 농사 지으며, 걸으며, 노숙하며 길 위에서 푸짐하게 놀아온 재미였나 봅니다. 글 짓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지산골을 누비며 씨 뿌리고 나무를 심고 캠핑하며 살아왔습니다. ‘자연의 경험’을 글로 그대로 옮겨 ‘자연의 흔적’을 남겼을 뿐입니다. 하여 기자라는 직함이 부끄럽습니다.
말 못하는 자연과 인터뷰하며…
오랫동안 자연에 뒹구는 일을 정성껏 써왔지만 후일에 그 글을 읽으니 부끄러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십 년을 자연 속에서 지내온 세월의 주름살과 수척해진 몸으로 쓰는 근래의 글이 제 벗이 되어주는 것 같아, 자연의 감촉과 풍경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늙은 기자는 한 편의 詩 같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인간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자연을 읽어냅니다. 말 못하는 자연에 숨겨진 상념을 인터뷰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주관적 견해가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보여주는 맑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치유의 마음을 우리는 정성껏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연의 사랑을 새벽이슬의 눈으로 보듬습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생의 중심에 자연을 품고 인성을 다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자연을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 때는 미처 몰랐던 깨달음이지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근원을 생각해 봅니다.
좋은 책도 많고 유익한 강의도 흔합니다. 멋진 말도 넘쳐납니다. 모두 옳은 것뿐이고 그 속의 인류를 향한 일침도 소중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리 배우고 야단을 맞아도 그때뿐일까요? 왜 늘 불안하고 부족함을 느끼는 걸까요? 자연이 그 답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노기자는 자연 속에서 스스로 묻습니다.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너무 어려운 물음이라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봐.
“‘소박한 삶의 풍요로움’ 입니다.”
‘성공과 돈’이 유일한 꿈이라고 야단들인데, 궁상맞게 ‘소박한 풍요로움’은 또 뭐야?
“물론 돈과 성공이 중요합니다. 돈 없으면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위축됩니다. 그러나….”
이제, 고만해. 아는 체 하지 말고. ‘소박한 삶의 풍요로움’이라는 말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말이야. 어서 부지런히 돈이나 벌어!!
“네, 돈은 물론 벌어야죠. 그런데 무엇인가 중요한 핵심을 빠뜨리고, 돈만 벌라고 몰아붙이는 것 같습니다.”
참 답답하네, 돈이 핵심이지 무슨 또다른 핵심이 있다는 건가?
“돈을 향한 욕심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행위도 곧 욕구이자 본능입니다. 식량을 사는데는 돈이 필요하고요. 전세계 사람 그 누구도 돈 벌 욕심에 차 잊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돈 벌라는 이야기는 이제 고만하세요.”
알겠네. 인간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식욕, 성욕, 쾌락과 같은 원초적 욕구를 채워야 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다른 것이 핵심이라는 건 무슨 말인가?
“‘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 하나?’ 이 문제를 먼저 알아야 ‘소박한 삶의 풍요로움’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구가 고통을 불러오니까요.”
어렵게 말하지 말고 간단하게 말해봐….
‘인간은 왜 인정 받고 싶어 하나?’ 노 기자는 자연 속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갈구해왔습니다.
고통의 근원
인간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남들은 모두 웃는 낯에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울까?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은 고통을 더 합니다.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구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반대로 자신도 남의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행복과 고통은 이렇듯 인정 받고픈 욕구에 의해 좌우됨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의 연속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모든 욕구를 채울 수 없는 것이 실존의 한계입니다. 한편으로 이 ‘인정 욕구’는 경쟁을 일으키는 원천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열심히 배우고 일하여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경제사정이 낮은 계층에서 차상위 계층으로 도약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가난의 대물림은 문화이다”라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 속 글이 늘 떠오릅니다.
인간이 지닌 인정 욕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고통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정 욕구의 두 갈래
인간이 욕구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자연적 욕구’와 ‘의식적 욕구’ 두 가지로 나눕니다. ‘자연적 욕구’는 본능적 욕구이고, ‘의식적 욕구’는 의도적인 행위를 개입시키는 경우입니다. 이는 ‘사회적 욕구’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욕구 중에 자연을 찾는 욕구가 유일하게 제일 신선하고 순수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아무리 좋은 일도 계속 반복하면 흥미를 잃게 되고 질리게 되는데, 자연만은 아무리 접해도 싫증이 안 나고 영원합니다. 구순을 앞둔 노기자가 수십년을 자연 속에서 지내며 깨달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욕구를 줄여야 합니다. 그 남은 욕구는 마저 자연 속에서 방출해야 합니다. 이로써 삶의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욕구를 무엇으로 줄이나?
“정답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
“각자의 몫입니다.”
당신의 사례를 들려주게.
“좀 긴데 들어주십시오. 나의 욕구의 목표는 자연을 찾는데 있습니다. 나의 방랑은 산이고, 들판이고, 여행이고, 지구입니다. 주말에는 야영하며, 농사일하며, 살롱문화 워크숍으로 자연 속에서 뒹굽니다. 이 목적을 위한 소비가 나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즐거운 사치입니다. 물론 자연의 사치에는 어림도 없지만요. 내가 소유한 것은 야영도구와 책, 컴퓨터, 휴대전화, 농기구, 차량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텐트와 침낭은 재산목록 1호이지요. ‘시신 기증 유언서’를 휴대하고 다니며 보험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나는 산에 갈 때 나를 버리러 갑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늙어 할일이 없어져서, 취미삼아 시간을 때우는 것쯤으로 여길지 모르겠으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젊어서부터 오늘까지 일관되게, 자연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일이나 생계를 내팽겨 칠 수 없기 때문에, 여차한 경우라도 일을 해치우고 난 후에 산에 갔습니다. 이런 보람을 죽어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일과 생활에 매몰되어 자기생활을 할 수 없다는 핑계는 자기에 대한 모독이며 기만입니다. 죽는 날까지 나의 책임 하에 나의 시간을 100% 활용합니다. 가족이나 주위에 더 큰 자유를 완벽하게 개방하고, 그들과 섬에 살듯 서로 떨어져, 갈매기 좇는 돛단배로 소통하고 지내는 ‘문화-소통’의 삶을 연상해 주십시오. 서로 따로 또 같이 그러나 또 따로…. 멀리 떠나는 우리….”
인간의 조건은 욕구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조건은 홀로서기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소박한 삶의 즐거움’입니다. 세속적인 욕구가 끼어들 수 없는 맑은 생활을 영위하나, 호시탐탐 여행을 노리는 떨림에 기대어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