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일제시절, ‘홍도야 울지 마라’ 구슬픈 노래자락이 그립다

사랑방 문화, 다르게 사는 모던과 낭만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자연과 삶’ 전문기자, 캠프나비 대표]?내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는 안방에서,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사람들을 매일 모아놓고 언문으로 인쇄된 이야기책을 읽어주며 한밤중에 밤참을 먹는 게 일상의 습관이였다. 그때 나는 부모의 턱밑에서 밤잠을 안자고 책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언문을 아름아름 깨우친 게 전부이다. 그래. 나의 언어에는 감자바위 사투리와 어눌한 촌뜨기가 공생하는 경합죄를 받아 마땅한, 개화기 언어를 쓰는 토박이 촌놈이다.

유년시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유년시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박상설 ‘자연과 삶’ 전문기자>

안채 안방에서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은 <장화홍련전> <심청전> <놀부와 흥부> <이순애와 심수일> 등인데 오만간장을 녹이는 민초들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문고 형 단편소설’이다. 바깥채 사랑방에서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춘원 이광수의 <사랑> <무정> <유정> <단종 애사>, 김동인의 <감자>, 염상섭의 <만세전>, 현진건의 <고향>, 주요섭의 <일력거꾼>, 나도향의 <물레방아> 등 개화기 시대의 급변하는 정경들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낭만과 구시대와의 갈등을 담은 작품들을 들려주었다. 근대 조선을 뒤흔든 경성기담, 모던보이 등 신문잡지에 연재된 충격적인 장르를 통해 개화기 후의 세상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시대에는 좋은 책 한권 골라 잘 읽으면 대학졸업과 맞먹는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다. 그래. 신식 하이칼라들은 서구 계몽기 르네상스 책과 개화기의 현대문학과 낭만소설 물결에 열을 올렸다. 책 읽는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는 자정 때 쯤 되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제물로 빠져죽는데 이 비통한 하이라이트에서는 안방의 헐벗은 아낙네와 할머니들은 엉엉 울며 서로 엉켜 붙어 대성통곡을 한다. 이때 어머니는 옛날의 변사처럼 애처롭게 흐느껴 읽으며 슬픔을 부추긴다. 배우지 못하고 못살던 개화기 후의 아낙들은 한 맺힌 삶을 온통 눈물로 얼룩지었다.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자자라 들면 사랑방에서는 보란 듯이 아버지가 큰 기침소리를 연거푸 낸다. 밤참을 청하는 암호인 것이다. 아낙네들은 그렇게 죽도록 울다가도 ‘언제 그랬더냐’ 싶게 희희 낙낙하며 아줌마 본성을 드러낸다. 움막에 나가 독안의 얼음을 깨고 동치미와 김장거리를 잔뜩 담아와 부엌에서 숭숭 썰면 한바탕 웃음보가 터진다. 불쌍한 조선여편네들은 처절하게 궁핍한 가난을 끈질기게 이겨내며 세상을 이렇게 보냈다.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자정 무렵에 막국수 집으로 밤참을 시키러가는 시간이 제일 신나는 시간이다. 눈 위를 검정고무신을 신고 총총걸음으로 걸으면 ‘뽀도독 뽀도독’ 지금도 귓전에 아련하다. 같이 따라나선 꼬마친구들 사이를 복실이가 이리저리 눈 위를 뛰어 누비며 킁킁댄다. 그 당시는 허기진 배를 움켜쥔 백성들이 야식을 먹는 습관이 있어 막국수집이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도 문을 열었다. 막국수집이 가까워지면 김 서린 불빛이 밤하늘에 뽀얗게 적시며 구수한 메밀냄새가 진동을 쳤다. 나는 하던 버릇대로 방안을 훔쳐보는 재미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필자가 가을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있다.
필자가 가을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있다.<사진=박상설 ‘자연과 삶’ 전문기자>

막국수 집 방에서는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구슬픈 노래 가락이 흘러나온다. 앳된 여인의 목소리에 섞인 젊은 남자 두서너 명의 노래··· 그 당시에는 춘천에 막국수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술집으로 팔려가는 직전의 길목이 이런 곳이어서 뜨내기 아가씨가 가끔씩 흘러들어오곤 했다. 부자 집 아들인 동경유학생이 방학을 맞이하여 오고 갈데없는 여심을 잡는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가슴쓰린 희망 없는 내일···.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그 시대를 ‘단장(斷腸)의 애가(哀歌)라 했던가.’ 코스모스 나부끼는 이맘때쯤 되면 개화기 때에 ‘근대의 벽을 허문 불꽃의 여성화가 나혜석’을 그리며 나는 한 없이 한 없이 막국수 집 여인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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