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가 국어였던 시절···어머니의 ‘효순가’로 국어에 눈뜨다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자연과 삶’ 전문기자, 캠프나비 대표] ?나는 소학교 시절때부터 지금껏 한글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일본어가 국어였다. 국사도 마찬가지로 일본사를 배웠다. 당시엔 한글을 ‘언문’(諺文)이라고 했다. 이 언문조차도 “가갸~ 거겨~”를 뇌까리며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다. 이후 맞춤법 규정을 되풀이해 읽어왔지만 막상 쓰려면 아리송하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묻는 것도 한두 번이다. 그럴만한 사람이나 참고서 해석도 마땅치 않다.
말은 하면서 글은 모른다. 이게 도무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이렇게 조국 말인 어문(語文)에게 죄인이 되어갔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일본말 대신 조선말을 하면 다른 학생이 벌점딱지를 빼앗아 선생님께 일러바쳤다. 처벌이 두려워서 아주 절친한 친구끼리만 우리말로 소곤대며 마치 지하모의 레지스탕스라도 된 듯 어두운 구석을 신나했다.
일제의 학정(虐政)은 성씨(姓氏)마저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시켰고 조선말을 뿌리부터 말살시키는 잔인한 정책을 참혹하게 펼쳐나갔다. 나와 같은 연배의 노인들은 이와 같이 일제에 희생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인 것이다. 그래서 세계문학 전집을 시작으로 루소 톨스토이 작품과 국부론, 자본론, 심리학 등의 인문과학 책들은 일본어 책으로 읽었다.
왕 늙은 애송이 기자의 한글시달림
이렇게 어려서부터 한글을 정규코스로 못 배운 탓에 지금도 글쓰기가 무척 고역스럽다. 겁부터 버럭 난다. 눈이 나빠져서 제대로 글을 볼 수 없는데다가 그놈의 한글맞춤법인가 하는 것과 띄어쓰기 등이 왜 그리도 어려운지 글쓰기가 무섭다. 국어사전에는 단어의 뜻만 매정하게 간단히 적혀있기 때문에 막상 문장을 만들려면 문법을 시작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인가 무언가 하는 복잡한 표기법등이 얄밉도록 밉다. 나는 우리말은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은 탓 인가보다.
일제시대 ‘언문’은 발음 나오는 대로 기호화 하고 받침법이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에 어렸을 때 무의식중에 각인된 언문은 이렇게 늙어가면서도 쉽게 떨쳐지지 못한다. 글 쓰는데 갑절의 애를 먹는다. 더구나 나의 오른쪽 눈은 세살 때부터 실명이 되어서 왼쪽 한눈으로만 보는데 이것마저도 4년 전에 황반변성 눈병이 생겨서 반 정도 겨우 보이지만 그래도 좋다. 남들은 한 시간에 쓸 글을 나는 하루 종일로도 부족하다. 한글에 중죄를 지은 내가 근근이나마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기자의 은전인가.
내 인생을 바꾼 어머니의 ‘효순가’ 읊조림!
나의 어머니는 그 옛날에도 언문을 깨우치고 이야기책을 자주 펼쳐들었다. 집 안팎일을 하면서도 개화기 때부터 고향에서 불려온 <효순가(孝順歌)> <농부가> <관동 팔경가>등의 창가(노래)를 심심풀이로 중얼거리기를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내 인생을 바꾼 그 ‘효순가’의 읊조림!
그 ‘효순가’를 철부지였을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이 왕 늙은이는 잊지 못하고 모태본능으로 어머니를 늘 떠올리며 나는 무의식중에도 ‘효순가’를 중얼대면 괜스레 가슴이 저려온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 ‘효순가’를 통해 나에게 언문을 눈뜨게 해주고 이웃의 가난하고 슬픈 사연을 불지불식간에 배냇짓 때부터 몸에 배게 해주어 자연스럽게 사람 됨됨이가 되게 길들이려고 한 터이다. 소박한 삶을 통한 맑은 가난의 풍요로움을 깨닫게 해주고, 나를 흙에 몰입하게 하여 모든 욕망의 속박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자연신앙의 길을 인도해주신 것이다.
<효순가>
1절 건너집이 일남(一男)이는 가난하여서/하루에 죽(粥) 한끼도 어렵습니다/아버지 어머니는 속이 상해서/하루는 마주앉아 슬피 웁니다.
2절 이때에 일남이는 책을 끼고서/학교서 밥 먹으러 돌아왔도다/그 애
는 지금 열두 살인데/소학교 4학년에 첫째랍니다.
3절 아버지 어머니는 왜 우십니까/오늘 친 시험이 만점입니다/아침에
배부르게 먹고 갔더니/아직도 배고프지 아니합니다.
4절 모래는 방학이니 방학한 뒤에/낮에는 김도 매고 소도 먹이고/밤에는 새끼 꼬고 신도 삼아서/쌀사고 나무 살게 걱정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