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布施)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금강경(金剛經)>에 의해서 천명(闡明)된 것이다.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어 있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무주상보시라고 보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사회봉사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 처음엔 열심히 따라다녔으나 시간이 갈수록 기대하고 하고 싶은 활동이 아닌 것 같았다. 예를 들어 겨울에 산동네에 연탄 한 차를 실어다 준다. 그리고 생색이라도 내듯이 현수막을 내걸고 사진을 찍고 신문 잡지에 요란하게 보도를 하고 난리법석을 떤다. 자랑을 늘어놓고 생색을 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엔 얼마 안가 발길을 끊었다.
남에게 베풀고 선(善)을 행하면서도 선이 더욱 커지지 못하는 것은 베풀었다는 생각, 선을 행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의식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내세우기 위해, 과시하기 위해, 남에게 베풀고 남에게 말하기 위해 선을 행한 것처럼 온 세상에 떠벌리며 자신이 행한 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으로 시끄러운 사람들,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말들 때문에 좋은 일을 하고도 공덕(功德)이 쌓이지 못하는 것이다. 선업(善業)이 쌓여 힘이 되기도 전에 조금씩 쏟아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쉼 없이 유루(有漏)의 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전혀 베풀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자랑 자체를 자신의 일로 삼는 심보 때문에 선을 더 큰 복덕이나 공덕으로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마(達磨) 대사를 만난 양무제(梁武帝, 464~549)가 물었습니다. “내가 오리(五里)에 작은 절 하나, 십리에 큰 절 하나씩을 짓고 수많은 승려를 만들어 불사(佛事)를 이루었는데 공덕이 얼마나 될까요?” “소무공덕(所無功德)!” 아무 공덕도 없다는 뜻이다. 자랑하는 마음, 공치사를 바라는 마음은 비움을 중시하고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본질로 하는 선(禪)의 세계가 아니다.
<금강경>에 이르시기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면 그 복덕(福德)이 불가사량(不可思量)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중생들이 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방편(方便)으로가 아니라 실로 무주상보시를 해야 헤아리기 어려운 복덕을 받을 수 있는 이치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베풀고, 주는 물질이 크고 작음에 구애 없으며, 선행이라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다. 어찌 여기에 자랑이나 과시가 붙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남을 돕는 일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남을 돕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보다 남을 돕는 일이 우선인 사람들도 있다. 누가 보아도 정말 바라는 바 없이 남을 돕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선을 행한다. 그러고는 그 선행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주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지 못하고 무주상보시를 못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업(業)’이 된다. 상(相) 없이 선업을 쌓아 가노라면 결국 그것이 무루(無漏)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우리의 마음을 어느 곳에 주(住)하고 마음을 일으켜야 할까?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하였다. 물질로 행복을 얻으려 하거나 권력이나 명예로 행복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보리행(菩提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허물을 청정히 하려는 것이 보리행이다. 자신의 허물을 씻는 것이 보리 수행이고, 자신의 허물을 정화(淨化) 시키는 것이 참회기도다.
인연 따라 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 역시 무주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집착하고 상을 내고 하는 인연은 결코 아무리 잘 해도 상생의 선연은 아니다. 따라서 인연을 지어가되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재물이던 명예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무주상보시’로 만냥의 황금을 얻는 것보다도 큰 공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