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어느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갑자기 며칠 전 잇몸이 붓고 아파왔다. 밤새도록 끙끙 앓으며 수건을 적셔 얼굴에 덮어도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음식도 맛이 없고 씹을 수도 없다. 70여년 잘 써온 치아가 이젠 틀니를 하든지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한다.

치료도 못 받고 항생제 몇 봉지 타가지고 돌아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평생 잘 살아 온 부부 중 누가 하나 먼저 가면 어떻게 하나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문득 노년의 사랑이 떠올랐다. 동시에 떠날 방법은 없을까? 혼자 남아 살아야 하는 비극(悲劇)은 정녕 없으면 좋겠다.

노년의 슬픈 연가를 소개한다. 김 노인이 75세, 황 할머니 73세, 두 노인이 만난 것은 재작년 가을 게이트볼 구장에서였다. 김 할아버지가 먼저 게이트볼을 배웠고 황 할머니가 늦게 배웠다. 운동 신경이 둔한 황 할머니는 배우면서 동료 노인들에게 핀잔을 많이 받았는데 김 노인은 항상 웃는 낯으로 황 할머니를 도와주었다.

그런 사유로 황 할머니는 김 노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김 노인은 혼자 아들에게 얹혀 살고 있었고 황 할머니는 홀로 살고 있는 터였다. 할머니는 젊어서 공직에 근무해 연금을 수령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기투합해 함께 살기로 했고 김 노인이 황 할머니 집으로 옷 몇 가지를 싸들고 이사를 왔다.

두 노인의 삶은 생기가 솟았고 밥 짓고 빨래하는 재미에 새로운 인생을 찾은 것이다. 김 노인이 삼겹살을 사오면 할머니는 상추와 소주를 준비했다. 두 노인이 한 잔술에 취하면 살아온 인생 70년을 얘기하기에 밤이 짧았다. 봄이면 꽃 잔치,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 가을이면 풍성한 들판, 겨울엔 따뜻한 구들장이 세월을 잊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노인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감기려니 하면서 병원엘 찾았는데 한 달 넘게 계속되어 큰 병원으로 갔다. 진단결과 폐암3기 진단을 받았다. 할머니는 김 노인 가족들을 제쳐두고 병간호를 했다. 좋다는 민간요법과 좋은 약도 구해서 먹였다. 그러나 할머니 사랑을 뒤로 한 채 끝내 김 노인은 눈을 감았다.

임종하던 순간 김 노인은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황 할머니의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려내렸다. 너무도 짧았던 만남, “한 십년 함께 살려 했는데….”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 노인 죽음이 믿기질 않았다. 영구차가 떠나던 날 할머니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모든 순간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사랑은 이별이 아쉬워 흐르는 눈물 속에 있는 법이라고 한다. 어느 의사가 전하는 더욱 가슴 아픈 노년의 사랑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아침 8시30분쯤 되었을까? 유난히 바쁜 어느 날 아침, 80대 노신사가 엄지손가락의 봉합사(縫合絲)를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며 다그쳤다. 의사 s는 노신사의 바이털 사인을 체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노신사의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다. 그래서 의사는 다른 의사를 불러, “노신사의 봉합사를 제거하고 드레싱을 갈아 드려야 하니 관련 장비와 소모품 일체를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노신사는 “아내는 치매(癡?)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지요”라고 했다.

의사는 부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의사 손을 잡고 말했다. “마누라는 나를 몰라보지만, 난 아직 그녀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의사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인생을 걸고 찾던 ‘사랑의 모델’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 의사의 팔에서는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진정한 사람은 육체적인 것도,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백 년을 채워 살지도 못하면서 늘 천년 어치의 근심을 품고 살아간다”(人生不滿百 常懷千歲憂)는 말이 있다. 당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순리(順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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