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이 가을, ‘바보 김수환추기경’이 그립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영악스럽지 못해 작지 않은 손해를 보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한 평생 뒤돌아보면 바보처럼 살았다고 굶고 산 것도 아니고, 야무지지 못해 몇 번씩이나 사업을 망쳐 먹었어도 별로 궁색하게 살지도 않은 것 같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세상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뜨거운 사랑을 불태워 온 것을 보면 조금은 바보처럼 사는 것도 훌륭한 한 삶의 방식인 것 같이 느껴진다.

문득 가수 김도향님이 부른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턱없이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온 인생을/ 저~ 흐르는 강물처럼/ 멋 없이 멋 없이 살았죠.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성산 장기려 박사(1911~1995)는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푸느라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이었다. 그 집에 머물고 있던 제자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배를 드렸다. 성산은 “금년에는 나처럼 살아보게”하고 덕담을 해주었다.? 제자는 모르는 척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 되게요?” 성산은 껄껄 웃음을 그치고는 제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 똑똑해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아름다운 바보들이 그립지 않은가? 바보 소리를 들으면 내 주변에 사람들이 편안하게 모인다. 그리고 바보같이 한 곳에 집중하면 꼭 성공을 한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당신의 자화상에 붙인 이름이 ‘바보야’이다. 2009년 2월 추기경께서 선종(善終)하신 후 언론에 공개되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바로 그 그림이다. 오래 전 <월간 원광(圓光)> 취재진과 함께 김수환 추기경님을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다. 그 때 그 그림을 보고 추기경님에게 여쭈었다. “왜? 자화상 밑에 ‘바보야’를 쓰셨습니까?” “바보 같지 않나요? 제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고, 크면 얼마나 크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 바보지, 그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 같이 산 것 같아요.”

바보! 이 얼마나 정감 있고 깊이 있는 말인가? 일본에서는 CEO에게 바보가 될 것을 주문한다고 한다. 전문바보를 뜻하는 ‘센몬빠가(傳問馬鹿)’라는 말을 통해 바보의 장점을 원용한 직장인 리더십과 직장 문화가 권장된다고 한다. ‘센몬빠가’는 한 분야에 바보스럽게 몰입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보라야 몰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바보정신이 장인 정신을 살려 기초과학의 기본이 되어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탄생시킨 원천이라고 한다.

바보에게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건 몰입(沒入)이다. 그 몰입이 문제를 풀어주는 힘이다. 바보 특유의 우둔(愚鈍)함이 어떤 폭풍에도 끄떡없는 방어벽을 구축하는 것이다. 까닭 없이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단순 바보 천성(天性)이 지복(至福)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큰 지혜는 바보 같다”고 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아내에게 “여보, 오늘 말을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것으로 바꿔올게”라고 외출을 했다. “잘 생각했어요. 좋은 것으로 바꿔오세요.” 농부가 말을 가지고 나갔다. 가는 길에 소를 가진 사람과 만나 소가 좋다는 말을 듣고 농부는 말을 소와 바꿨다. 그리고 또 소를 데리고 가다가 양을 가진 사람과 만나 이번에도 그가 양을 자랑하니까 농부는 다시 소를 양과 바꿨다.

돌아오는 길에 몸이 피곤해 잠시 주막에 들렀다. 그때 마침 주막에서 쉬던 한 부자가 농부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아마 당신 아내는 틀림없이 화를 낼 거요” 그러자 농부가 답했다.? “아닙니다, 아내는 틀림없이 ‘잘 했어요, 훌륭해요’라고 말할 걸요.” 부자가 말했다. “정말 그런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자루의 금화를 다 주겠소.”

마침내 이 바보 같은 농부가 귀족과 함께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내에게 오늘 벌어졌던 일을 죽 설명했다. 아내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참 잘했어요, 훌륭해요”라고 맞아주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부자가 말했다. “이런 가정이라면 내 돈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리고는 자루 속의 금화를 그 바보에게 몽땅 내주고 돌아갔다.

아무리 영악하고 똑똑한 사람도 사심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진리의 도움이 내리지 않는다. 결국은 험난한 일생을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사는 이치일 것이다. 조금 밑지며 살자. 조금 나누며 살자. 조금 손해 보는 셈 치고 세상을 위해, 이웃을 위해 조금 맨발로 뛰면 어떨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