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400만불의 독서’를 아십니까?
오래 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과의 인연으로 봉원동 자택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선생의 집은 밖에서 보면 3 층인데 안에 들어가서 보면 자그마치 6층집이다. 그런데 눈에 비친 그 댁의 보물은 아무리 봐도 현관부터 6층까지 만들어 놓은 서가(書架) 가득 들어찬 책들로 보였다. 2만권인가 꽂혀 있었고 4만권 정도는 따로 보관하였다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도올 선생의 형설의 공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이 나라 최고의 석학(碩學)이 된 것이 아닌지? 필자가 그 분을 따라가려면 저 발밑의 형설(螢雪)만도 못하다. 그래도 필자의 가보는 덕산재(德山齋)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이 아닐까 한다.? 물론 서재(書齋)가 비좁아 두어 차례 군부대 도서관으로 책을 실어 보냈지만 여전히 자랑스러운 건 천정까지 가득한 장서(藏書)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형설의 공은 가난한 사람이 반딧불과 눈빛으로 공부함을 뜻하는 말이다. 후진(後晉)의 이한(李瀚)이 지은 <몽구(蒙求)> 차윤전(車胤傳)에 보면 진(晉)나라 효무제(孝武帝)때,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생각이 깊으며 학문에 뜻이 많은 차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정형편이 좋지 못하여 낮에는 밖에서 일을 하여 살림할 돈을 벌었고, 밤에는 학문을 하기 위하여 반딧불을 잡아 명주 주머니에 넣어 그것으로 빛을 삼아 공부하였다. 그는 훗날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까지 오른다.
또 손강(孫康)이라는 사람도 어려서 부터 학문에 뜻이 있었지만 집안형편이 너무 가난하여 호롱불 밝힐 기름이 없어서 겨울이 되면 창가에 앉아 밖에 쌓인 눈에 반사되는 달의 빛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는 훗날 어사대부(御史大夫)의 벼슬까지 올랐다고 한다. 여기서 반딧불과 눈빛으로 어렵게 공부한다고 하여 형설지공이 유래되었다.
독서는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일이다. 청소년 시기는 완성을 지향하고 수양을 해야 하는 시기다. 기억력이 왕성한 시기이므로, 이 시기에 읽은 책들은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법이다.
“책 속에 길이 있고, 길 속에 인생이 있다”는 말이 있다. 독서를 통하여 자기 시대와 자기 국민은 물론 다른 시대와 다른 국민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또 저자(著者)의 지혜와 사상과 함께 책 속에 나타난 사회상과 인간상까지 익히며 인격 도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금부터 90여년 전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시골 소년이 런던의 어느 큰 교회를 찾아갔다. 소년은 집이 몹시 가난해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교회의 도서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공부도 하고 책을 읽으려고 무작정 올라온 것이었다.
소년의 등 뒤엔 수많은 책들로 가득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는 반짝 빛이 났다. 흥분한 소년은 책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두껍게 먼지가 쌓인 책 한권을 발견했다. 볼품이 없는 그 책은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듯 했다. 소년은 먼지라도 털 생각으로 책을 꺼냈다가 차츰 그 내용에 빨려들게 되었다.
그 책은 페브리에가 지은 <동물학>이었다. 소년은 서서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이런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곧 런던법원으로 가서 1136호의 서류를 가지십시오.” 어리둥절한 소년은 곧장 법원으로 달려가 서류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 서류엔 400만 달러의 유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년은 눈을 비비며 다시금 꼼꼼히 서류를 읽어보았다. “이것은 나의 유언장입니다. 당신은 나의 저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분입니다. 나는 평생을 바쳐 동물학을 연구하고 책을 썼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만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도서관에 기증하고 나머지 책은 모두 불살랐습니다. 당신이 그 교회의 내 유일한 한 저서를 읽어주셨으니 내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F.E.페브리에)
그 사건은 영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모두들 당시 돈으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유산에 관심이 쏠렸다. 소년은 페브리에의 뜻을 기려 영국 전역에 도서관을 세웠다. 그리고 좋은 책을 보급하는데 힘썼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생을 보냈다. 책 한 권이 소년에게 놀라운 행운과 변화를 자져온 것이다.
책 한 권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온갖 지혜와 지식, 경험을 몽땅 차지하는 것이다. 필자도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인 열정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 책들이 요즘 스마트 기기에 밀려 형설의 공이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 공부에는 끝이 없다. 형설지공을 쌓아 가자. 또 무슨 행운이라도 잡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