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언제까지 남의 장단에 맞춰 춤출 것인가?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에서 덩더꿍 춤을 추는 무녀(巫女)를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어렸을 때 지금은 가 볼 수 없는 경기도 개풍군 덕물산의 당골에 할머니를 따라 가 본적이 있다. 고려 말 최영장군의 사당과 적분(赤墳)을 모신 유명한 무당들의 집합 촌이다. 소설 <임꺽정>에도 나오는 이 무서운 당골에서 작두위에서 춤을 추는 큰굿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도 위태롭고 두렵고 간담(肝膽)이 다 서늘했다.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춰 신명(神明)난 신딸이 되어 내 몸이 아닌 듯, 내 맘이 아닌 듯, 이를 허옇게 드러내고서 금방 발바닥 물어뜯고 싶어 안달 난 작두 위를 ‘덩더꿍 덕기, 덩더꿍 덕기!’ 이곳이 물이려니, 이곳은 잔디려니 버선조차 신지 않고 새벽부터 새벽까지 펄쩍펄쩍 춤을 추는 무녀의 삶은 누가 보아도 전율(戰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아니한가? 남들이 울려대는 북소리에 미쳐 제 살 저미는지 모르고 제 맘 문드러지는지 모르고 춤만 추는 작두 위의 삶! 지금까지 우리네 생이 그렇지 아니한지 이제야 뒤돌아본다.
우리가 평생 뭔가를 이루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는 것도 멋진 인생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는 것도, 완벽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도, 경쟁에서 이겨 만족감을 얻는 것도, 다 원하는 일이고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와 존중과 인정과 만족감이 얼마나 갈까? 그리고 계속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엄청난 공력(功力)이 계속 투입되어야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작두 위의 무녀가 뇌리(腦裏)에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네 삶이 위태롭기가 저 무녀의 삶과 다름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 아닌지? 그렇게 북장단에 맞춰 위험한 춤을 추는 것보다는 제 흥에 겨워 저만의 춤을 추는 것이 더 중요하고 수지맞는 장사가 아닐까? 성공도 중요하지만 성숙을 더 중요시하는, 경쟁보다는 화합을 통해 상생상화(相生相和)를 이루는 그런 삶이 진정 완전한 삶이 아닌지?
위대한 사람이 되는 일은 멋진 일이다. 청담(李靑潭 1902 ~1971) 대선사(大禪師)께서 생전에 설하신 ‘인생의 헛된 삶과 참된 길’이라는 법문이 이 길을 제시한 것 같아 정리하여 소개한다.
우리 인간이란 본래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또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며 그저 막연히 생겨났으니 살 때까지는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고달픈 삶에 쫓기다보면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각박한 현실생활일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공장직공 정치인 학자 종교인, 심지어는 석가 공자 예수에 물어볼지라도 잘 살려는 마음, 이 한 생각만은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누구나 잘 살려는 이 한마음을 가졌을진댄 잘 살 수 있는 어떤 법칙이 필요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잘 사는 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하는가를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다. 세계의 경제를 한 손에 넣고 주무르는 재벌이나,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제왕이 되거나, 또 사자후의 웅변을 토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만들고, 천하의 독자를 붓 하나로 놀라게 하는 대문호가 된다면 이것을 일러 잘 사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부귀 명예를 헌신짝같이 던져버리고 뜬 구름처럼, 흐르는 물 같이 살림을 삼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양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일러 잘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인가? 아니다, 이 모두가 겉치레의 잘 사는 방법이 될는지는 몰라도 참된 의미에서 말하는 잘 사는 방법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잘사는 것인가? 부족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원망이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성냄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공포와 불안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강제와 속박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해탈과 자유가 있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마음에 흡족한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 진리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잊고 남의 장단에 춤을 추며 죽음이라는 구덩이 앞에 다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하여야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보고 이 고해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범부중생은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재물에 대한 욕심, 색에 대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다섯 가지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하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러니 이 탐·진 ·치 삼독(三毒)과 오욕(五慾) 병을 고치지 아니하고는 일체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서 영원한 절대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돈이나 지식이나 권리가 많으면 그것이 도리어 죄악을 짓게 하는 근본이 된다. 천하의 재벌들도 마음을 잘 쓰지 못해 붉은 벽돌집에서 지낸다. 이제 남의 장단에 맞춰 작두 위에서 덩더꿍 춤을 추지 않으려거든 마음을 알아 마음을 요란하지 않게, 어리석지 않게, 그르지 않게 바로 써야한다. 그래야 돈과 지식과 명예나 권력이 비로소 영한 복으로 화하는 것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