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관은 내게 가려져 있던 창을 열어주었다. 냉전시대 반공을 위해 금지됐던 책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의 자료실에는 김일성 주체사상이 있고 김일성 선집들이 있었다. 마르크스
Author: 엄상익
[엄상익 칼럼] 나의 수첩…마음에 와닿는 대목 쓰고 외우고
한동안 예쁘거나 특이한 모양의 수첩을 사서 모았다. 인사동의 노점에서 파는 수제 수첩을 구하기도 하고 가죽으로 장정한 공책을 사거나 인도에서 두꺼운 종이로 만든 투박한 수첩을 사기도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⑨] 북파공작원의 영혼을 위하여
나는 장교로 최전방 눈 덮인 휴전선을 밤새 순찰을 돌기도 했다. 군 정보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힘든 상황을 공감하고 싶었다. 깊은 산속의 지하의 칠흑같이 깜깜한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⑧] 남산 지하실의 철학
국가안전기획부의 교육과정을 통과했다. 나는 처음 몇 달 동안 정보기관의 수사관 경험을 했다. 수사국은 남산자락에 있는 붉은 타일의 장방형 건물이었다. 저주가 맺혀있는 악명높은 남산의 지하실이 그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⑦] 육사 출신 사명감 불타던 그는 훗날 국정원장에···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재판받던 그를 변호하다 [아시아엔=엄상익 변호사, 대한변협 대변인 역임] 나는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고급 간부와 만났다. 변호사 시절부터 알던 정보관으로 나중에 국정원장이 된 인물이다.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⑥] 먹는 물에 독이 들어간다면
나는 계단식 강의실의 맨 뒷자리에서 정보요원들에게 예언같은 말을 하는 교관의 얘기들을 듣고 있었다. 대테러에 대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세균전의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학자 몇명이 연구소에서 변종
[엄상익 칼럼] 멀리서 찾아온 친구
노년의 한가로운 시간은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다. 나는 그 노년의 여백을 즐거움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고 글을 쓰는 즐거움이 있다.
엄상익 변호사의 ‘정보기관을 위한 변론’
1979년 12월, 수도군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군사반란이 있었다. 44년 전 일이다. 반란군인 공수부대가 군단사령부 작전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걸 묵인하면 반란에 동조한 것이 되고 막으면
[엄상익의 촌철] ‘무소불위’ 안기부에 검찰도 법원도 무력했던 5공시절
홍준표 대구시장은 어린 시절 순경이 아버지를 막 대하는 걸 보고 검사를 꿈꾸었다고 했다. 우리 또래가 소년 시절 흔히 보던 광경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 나는 빈민촌인
[엄상익 칼럼] ‘권력형 검사’와 ‘인권변호사’
36년전 조영래·신기남·이원영 변호사를 추억하다 1987년 2월 5일 아침 10시경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으면서 서소문 거리는 질척거렸다. 도로변에는 먼지 섞인 눈 덩어리들이 천덕구러기가 되어 뒹굴고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⑤] 국가에 목숨 맡기고 음지에서 싸우는 ‘전사’
정보요원 훈련 중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몇몇 요원이 외출을 나갔다가 카페에서 건달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요원들은 그런 경우 기가 죽어서도, 져서도 안 됐다. 조직의 자존심이다.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④] 여성요원들 투지와 집착도 대단했다
그 며칠 후 나는 정예 요원들이 훈련 중인 코스에 중간에 합류하게 됐다. 세상에서 갑자기 첩보영화 안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봉쇄된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③] “조직적이고 방향성과 이념적 지향이 있는 듯했다”
나는 군부대 같은 곳 앞에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회색의 높은 담이 보였다. 중간쯤에 대형 철문이 있고 그 앞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가죽졈퍼에 감색 헬멧과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②] 안기부 면접관과 마주하다
나는 36년 전 봄날의 하루가 적힌 일기장을 보고 있다. 나는 종로5가 뒷골목 낡은 빌딩의 한 사무실에서 안전기획부의 인사담당 요원을 만나고 있었다. 푸른 와이셔츠에 감색 넥타이를
[엄상익 칼럼] 내 믿음은 위선일까?
얼마 전 본 댓글 두 개가 마음에 남았다. 그중 하나는 내 글이 신학적 이론의 틀에 나의 경험과 생각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만 움직인다고 하면서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