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은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일대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유례없는 대 손실을 입고 전선에서 대규모의 집단이탈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반면 전체 전선에서 반격을
Author: 김국헌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39) ‘밴플리트 탄약량’···하룻밤새 50억원 어치 포탄 퍼부어
밴 플리트 장군은 와해된 3군단을 해체하여 미 9군단과 한국군 1군단에 편입함과 동시에 미 3사단과 187공정연대를 투입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한계리에서 하진부리와 강릉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8) 한국군 최대 굴욕 ‘현리전투’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가 시작되던 1951년 5월 16일 밤 3군단은 현리 동쪽 가로리-가리봉 사이의 26km에 달하는 정면에 9사단을 왼쪽, 3사단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있었다. 현리는 군단 지역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7) “항복을 허락한다”
수차례의 공세작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서부의 13병단을 뒤로 돌리고 1951년 2월 새로 도착한 3병단과 19병단, 그리고 장진호전투 이후 전력을 보강한 9병단을 전선에 투입하여 1951년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6) 3·14 서울 재탈환과 맥아더 해임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가 지평리 등에서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패퇴하자 리지웨이 장군은 작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9군단과 10군단으로 단계적 제한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김국헌의 직필] 1조달러 퍼부은 미국 제압한 ‘베트남영웅’ 지압 장군
‘붉은 나폴레옹’ 보구엔 지압(武元甲) 원수가 지난 9월 102세로 서거하였다. 지압은 1950년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1960-70년대의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1979년 중월전쟁에서 중국군을 물리친 영웅이었다. 고등학교 역사선생이었던 지압은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5) ‘지평리 전투’, 릿지웨이의 진면목
신정공세(新正攻勢) 이후 남진을 계속, 1월 초 수원-이천-원주-평창-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남하한 중공군은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기동이 제한되고 보급마저 원활하지 못하자, 일단 이 선에서 남진을 멈추고 새로운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4) 가슴에 수류탄 2발 ‘리지웨이’
1950년 12월 29일 미 합참은 새로운 정책결정과 전략계획을 요구한 맥아더 장군에게 “유엔군의 전력보존에 유의하여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되, 일본방위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여 한반도로부터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3) 1·4후퇴 열흘 전 이승만 ‘220만 서울시민 피난령’
청천강와 장진호에서 세계 최강의 미군을 격파함으로써 자신을 얻은 중공군은 급기야는 한반도와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중공이 합법정부로서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로써 이 무렵 휴전안을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2) 독선·편견으로 중공군 개입의도 오판
미 8군과 10군단을 연결시키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실수이나, 그보다 근본적인 실패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본 전략정보 판단상의 실수였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만이 아니라,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1) 교통사고 워커 후임에 릿지웨이 임명
12월 15일을 전후하여 임진강~38도선을 연한 방어선으로 철수한 8군은 미 1군단의 25사단과 한국군 1사단을 문산~서울 축선에, 미 9군단의 한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을 철의 3각지~서울 축선에, 한국군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0) 미군의 작전상 후퇴?···’일본군 옥쇄’와는 너무 달랐다
8군의 우측방을 지키기 위해 2사단이 치룬 대가로 1군단과 9군단은 11월 30일 청천강을 도하하여 숙천(肅川)~순천(順川)선에서 급편방어선을, 다시 12월 3일에는 순안(順安)~성천(城川)선으로 철수하여 평양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성천이 중공군의 수중에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29) 미 육군 초토화, 그러나 Chosin Few는 전설로 남아
11월 27일 중공군 9병단 예하 79, 89 및 59의 3개 사단이 장진호 일대에 매복하고 있다가 미 해병 1사단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 후방에서는 58 및 76사단이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8)’맥아더의 신화’ 무너지다···인디언 태형처럼
1950년 10월 하순 압록강으로 진출하려는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1차 공세의 목표를 달성한 중공군은 11월 6일 새벽 전체 전선에 걸쳐 일부 병력만 남겨놓고 주력은 재편성을 위하여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7)이승만 10.27 대대적 개선행사···파국의 시작
유엔군은 1950년 10월 23일 청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24일 맥아더 장군은 9월27일 합참에 의해 설치되었던 정주~영변~함흥을 잇는 북진한계선(일명 맥아더라인)을 철폐하고 전군에 압록강 선으로의 총 진격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