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필리핀 유학생과 서울의대 안규리 교수의 ‘아름다운 인연’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1월 중순 필리핀에서 서울대 사범대에서 박사과정(글로벌 국제교육협력)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중인 에바 마리 왕(28)이 <아시아엔>을 찾아왔다. 필리핀 전통차인 ‘구야바노 티’와 ‘망고 스틴 티’ 그리고 과일 크래커를 마닐라삼으로 곱게 짠 망사 봉투에 담아서 가져왔다.
내가 에바 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꼭 2년 전 이맘때 당시 <아시아엔>에서 영어판을 맡고 있던 리사 위터로부터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서다. 서울대 해외유학생회(SISA)을 처음 만들고 한국해외유학생회(KISA) 회장을 거쳐 <아시아엔> 영문판 에디터와 아시아기자협회 대외협력팀장을 맡고 있던 리사 위터가 어느 날 전화를 해왔다. “필리핀 유학생 친구가 있는데, 한국의 어느 기관에서 받던 장학금이 있었는데, 2014년 1학기 등록을 앞두고 갑자기 끊겨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등록금을 못 내면 귀국해야 할 형편입니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리사 위터는 자신이 수혜를 받은 바 있는 서울대 총동창회 장학금을 염두에 두고 내게 부탁해온 것이다. 나는 곧바로 서울대총동창회에 전화해 에바 왕의 딱한 사정을 전했다. 총동창회로부터 이날 오후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 학생들을 위해 동문들이 십시일반 기부한 장학금을 쓰는 것이니, 필리핀 유학생의 전공학과와 인적사항을 달라”는 것이다.
이후 2년이 지나 에바 왕은 박사과정을 무난히 마치고 지금 논문준비중이다. 그 사이 외국인 최초로 국회의원이 된 이자스민 의원실에서 인턴을 하면서 다문화가정과 이주민들에 대해서도 많은 현장 경험을 쌓았다고 했다.
지난달 중순 에바 왕이 <아시아엔> 사무실을 떠날 즈음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에바 왕씨. 아주 귀한 선물 고마워요. 지난해 여름에도 필리핀산 망고를 보내줘 아시아엔 직원들이 맛나게 나눠먹었는데, 이번에도 마음의 선물 잘 받았어요. 그런데 이걸 내가 존경하는 분께 드려도 될까요?” 그가 내게 “혹시 누구한테 전할 거냐”고 묻는다.
“서울대 의대 교수님인데…” 그때 에바 왕은 뭔가 짐작이라도 한듯 되물었다. “혹시 안규리 박사님?” “맞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죠?” “그럴 것 같았어요. 제가 주한 필리핀유학생회 회장을 맡았었는데, 그때 어떤 분이 매년 필리핀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시고 있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누군가 하고 찾아나섰는데, 그분이 안규리 교수님이었어요.”
그랬다. 에바 왕이 내게 준 마음의 선물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그분이 바로 안규리 교수였다. 그런데 그 안규리 교수가 수년간 필리핀 유학생들에게 ‘이름없는’ 장학금 기탁을 해왔다니…
내게 이따금 서울대병원 진료 부탁을 해오는 이들이 있다. 외국인이거나 중환자 혹은 사정이 딱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 배경이라고 불리는 ‘빽’이 없는 이들이다. 그러니 내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부탁을 주로 들어주시던 분이 안규리 교수다.
며칠 후 안 교수께 에바 왕의 마음을 전했다. 필리핀 밀림에서 필리핀 사람들의 정성으로 빚어진 전통차가 이렇게 따스한 가슴으로 이웃을 돌보는 분에게 전달됐으니?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이 글을 쓰면서 2014년 초여름 별세하신 고려대 의대 학장을 거쳐 한림원 종신회원과 삼성의료원 고문을 지낸 박승철 전 고려대 의대 학장(SARS대책위원장 역임)이 1998년께?한 말씀이 떠오른다. “이 기자. 의과대학엔 10명 중 2명만 머리 좋은 학생들이 들어오면 돼요. 나머지는 가슴이 따뜻한 애들이어야 해요. 의사도 마찬가지요. 그중 2명은 의료기술과 의료기기 개발하는 일하면 됩니다. 환자는 의술로보다 의사들의 말 한마디, 스킨십으로 절반 이상 치료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