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보기] 이장호 감독, 신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이장호 감독 20번째 영화 ‘시선’ 발표
2010년 썼던 인터뷰에서도 진단했듯 이장호 감독은 “한국영화 역사의 큰 산이요 긴 가교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한국영화사’라는 거대한 산맥과 계곡을 넘을 수도, 건널 수도 없다.”라는 수사가 어울린다.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한국영화, 나아가 한국의 문화와 사회를 강타한 이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에 이르는 십수 년의 한국영화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절대적 존재’다.
그러나 “그의 지난 20여 년은 저물어가는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며 영화인 타이틀을 이어갔지만 과거의 영광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중앙일보, 박정호의 사람풍경 <별들의 고향> 데뷔 40년 이장호 감독) 그랬다. ‘영화감독’으로서 이장호는 잊힌 지 오래였다. 열아홉 번째 장편 연출작인 <천재선언>(1995) 참패 훨씬 이전부터, 구체적으로는 <나그네…> 직전의 <Y의 체험>(1987) 이후 그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순간도 영화계를 떠난 적이 없었다. 학교, 방송, 영화제, 영상위원회, 오페라 연출 등 다양한 영화 관련 분야를 동분서주하며 현장을 지켰고, 스무 번째 장편 영화를 준비해왔다. 그의 이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물러왔던 셈이다.
이 감독은 2010년 8월31일 서울대 평생교육원 개원 기념 공개 특강에서 차기작으로 “선교 도중 납치를 당한 극한 상황에서 순교와 배교의 기로에 선 인간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차기작은 4월16일 개봉한 스무 번째 장편 연출작 <시선>이다. 무늬만 선교사인 조요한(오광록 분)의 안내에 따라 가상 국가 이스마르 리엠립 지역으로 기독교 선교를 떠난 8명의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휴먼 기독교 드라마다. 영화 속 아홉 캐릭터는 이슬람 반군에 피랍돼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한다. 배교를 선택해 살아날 것인지 순교를 선택해 죽을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위선·거짓·불신·미움·폭력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 영화, 크리스천인 내게도 논란은 말할 것 없고 오해의 여지가 적잖아 보인다. 감독이 ‘죄악의 영화’라고 규정한 그 간의 대다수 전작(前作)들과는 달리 ‘복음의 도구’로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 작의를 인정하더라도, 기독교를 전면에 내세운 소재·주제로 인해 정작 감독이 그토록 중시해온 영화적 판단과 평가를 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 충돌이나 불관용 등의 문제는 역사적으로나 현 상황으로나 세계적 핫 이슈 아니던가. 차라리 일반적 제재로 기독교 가치를 짚는 방식을 선택했더라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의 개봉 전 네티즌 평점(www.naver.com 참고)은 처참한 지경이다. 2.10점이다. 그 최악의 평점도 ‘듀나’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온 정체불명의 유명 평자가 트위터에 올렸다는 관람평에 비하면 애교스러운 편이다. <시선>이 ‘순교 포르노’란다. 누군가는 이걸 틀고 자위행위도 하겠단다. “89분의 러닝타임이 한 네 시간쯤 되는 줄 알았다”면서. 캄보디아에서 로케 촬영한 영화를 마치고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故 박용식 배우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한 감독의 발언까지 문제 삼으면서…
위의 평가들에 반론을 펼치거나 시비를 걸 생각은 추후도 없다. 공개할 거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 바람도 과욕이려니 치련다. 그럴거면 애당초 그처럼 극언까지 동원하며 막 나가진 않았을 테니까. 막장 드라마를 비판한다면서 그보다 더 막나가는 이들처럼. 문득 밀려드는 의문들. 부산국제영화제(의 남동철 한국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순교 포르노를 지난해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에 공식 초청했던 걸까? “<시선>은 이장호의 예술적 담대함이 그동안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알려주는 흥미로운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평론가 김영진의 진단은 또 어찌된 걸까?
강우석 감독은 왜 자처해 그 영화의 배급을 맡았으며, 바쁜 봉준호 감독은 왜 씨네21과의 인터뷰에 동행하는 등 영화에 힘을 실어준 걸까? 평소 이장호 감독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던―어디 그 둘 뿐이랴!―그 두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는데 그들의 영화적 안목이 그만큼 후진 걸까? 영화진흥위원회 마스터영화 제작 지원작으로 <시선>이 선정된 거야 이장호라는 이름에 대한 배려라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들에게도 종교적 신념을 넘어 인간의 본성을 향해 던지는 영화의 메시지가 가슴에 닿은 건 아닐까? 내게 <시선>이 소중하다 못해 아름답게 다가서는 것은 영화가 수·걸작이어서는 아니다. 감독과의 개인적 친분이 두터워서는 더더욱 아니다. 수·걸작이건 범작이건 태작이건 졸작이건 2011년 빚어낸 단편 <실명>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신의 창작품들에 투영·표현하려 했던 이장호 특유의 저항성과 문제의식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다. 고희를 목전에 둔 초로의 감독이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쏟아 부은 땀과 노력이 아름다워서다. 그것은 이른바 영화적 완성도―<시선>의 영화적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그 점에서 <시선>은 단연 주목할 만한 문제적(기독교) 영화요, 귀중한 시도다.
이장호 감독은 2010년 전주대 교수 퇴임기념식 고별사에서 그만의 기독교(적) 영화관을 역설했다.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앵글이 중요한데, ‘새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bird?s eye view)이 있고 ‘벌레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worm’s eye view)이 있듯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점’(god’s eye view)이 있는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형상에 가장 부합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기능은 미술이나 음악 등 다른 예술보다도 하나님의 창의력을 더 가시적·입체적으로 잘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영화야말로 성경의 창세기와 가장 가까운 예술이라면서. <시선>은 결론적으로 이장호의 신적 영화관이 담긴 아시아 영화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은 문제적 소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