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국제영화제서 얻은 횡재, 거장의 아주 특별한 ‘인생수업’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필자(왼쪽)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필자(왼쪽)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 <사진=전찬일>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장] 이집트 출신 아시라프 달리 쿠웨이트 <알 아라비> 매거진 편집장, 이세중 변호사, 윤양희 서예가 등과 2014년 만해대상(문예부문)을 수상한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뜻하지 않게 만났다. 지난 12월 3~6일, 미국영화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 MPA) 초대로 다녀온 제26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11.26~12.06)에서다. 2014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13개월만의 전혀 예정에 없던 해후다. 그는 특별전(Tribute to Mohsen Makhmalbaf)과 더불어, 2014년 첫 수상자 임권택 감독에 이어 두번째 공로상 수상자로 싱가포르에 머물고 있었다. 필자는 5일 오전 11시에 잡혀 있던 마스터클래스와, 특별전 상영작 중 한편인 <아빠의 영화학교-모흐센 마흐말바프>(Daddy’s School) 상영 30분 전 싱가포르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행사장 건물 안 카페에 갔다. 그런데 그 옆 자리에 마흐말바프 감독이 있는 게 아닌가. 부산영화제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 등과 함께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우리는 깊은 포옹을 나눴다.

마흐말바프 감독은 <매거진N> 2015년 2월호(<아시아엔> 1월13일자)에 게재된 ‘할머니가 내 영화의 스승’이란 제목의 특별기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가족들에게 영화이론과 실무에 관해 알려줬다. 우리 집은 마치 영화학교 같았고, 가족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영화를 배워갔다”. <아빠의 영화학교>는 다름 아닌 그 ‘영화학교’에 관한 성찰적이며 감동 넘치는 70분 짜리 소중한 기록이다. 이 영화는 이란과 영국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며, 주로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1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든 하산 솔주 감독이 연출했다. 그는 거장 마흐말바프의 가족이 몇해 전부터 살고 있는 영국 자본으로 이 다큐를 연출했다. 이 다큐는 2014년 부산영화제 ‘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등에서 선보인 바 있었다. 영화는 무슨 연유에서 <아빠의 영화학교>가 탄생하게 됐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부인 마르지에, 두딸 사미라와 하나, 아들 메이삼, 그리고 강아지 트위기에 이르기까지 가족 구성원 여섯 모두가 영화인이 됐는지, 나아가 그들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장차 어떻게 살아갈지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도 실려 있듯, 영화는 ‘가난과 혁명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교육 및 영화철학은 물론 인생관 등을 두루 탐구한다.

거장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영화와 연관된 유서 깊은 명제에, 총 여섯 개의 답변을 들려준다. 상상력, 질문, 현실, 사유, 사랑, 그리고 인생이 그것이다. 다소 추상적이면서 상투적인 감도 없진 않으나,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10대 시절부터의 반정부투쟁에서 출발해 문학을 거쳐 20대 중반 투신한 감독의 영화 이력이 결국 그의 삶 자체였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정의들이다. 무엇보다 상상력을 첫 번째로 내세운 정의가 인상적이다. <아빠의 영화학교>는 “시공간적 한계에 묶여 있지 않다. 어디든 학교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교재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동료이기도 한 모흐센은 언제 어디서든 가르칠 수 있는 칠판을 짊어진 유목 교사다. 사회참여적이면서도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마흐말바프 가족의 영화는 이러한 교육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프로그램 노트 中)”라고 말한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아빠의 영화학교’. 이 영화는 마흐말바프의 교육관과 영화철학, 인생관을 담아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아빠의 영화학교’. 이 영화는 마흐말바프의 교육관과 영화철학, 인생관을 담아냈다.

이보다 멋진 영화수업, 아니 인생수업을 내가 받은 적이 있던가?
이게 다가 아니다. 거장은 그 못잖은 가르침을 내게 선사했다. 12월5일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실버 스크린 어워즈 시상식 중 공로상 수상 순간이었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소감 대부분을 부산영화제와, 부산영화제의 ‘어떤 이’에게 감사하는 데 할애하는 것 아닌가. 김동호 명예 집행위원장을 말하는 것일까? 일찍이 거장은 18회 부산영화제에서 선보였던, 영화감독 김동호의 첫번째 단편영화 <주리>의 제작일지인 <그의 미소>에서 ‘정부관료에서 시작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거쳐 영화감독으로 변모해온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의 과거와 현재를 ‘우정 어린 시선으로’, 일상과 변하지 않는 그의 미소 속에 담아냈다. 김동호는 그러나 시상식 현장에 없었다. 그렇다면 부산영화제 아시아 영화담당인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가리키는 것일까? 김지석은 싱가포르영화제 자문위원이기도 해 마침 시상식 현장에 거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정체성과 정신이 온전히 기록되어 국내외 독자들에게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출간했다는 <영화의 바다 속으로-부산국제영화제 20년 비하인드 스토리>(본북스, 2015)에도 피력했듯, 김지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마흐말바프 감독을 “나의 멘토요 구루”라고 역설해왔다. ‘내 인생의 구루,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 편에서 김지석은 말한다. “부산영화제와 함께 한 20년 동안 수많은 게스트를 만났고, 많은 분이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마흐말바프 감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그러면서 김지석은 “마흐말바프 감독은 겸손하고 편견 없는 박애주의자요, 현자와 같은 삶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영화인”이라고 평했다. 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 그것도 아시아 영화에 대한 전문성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러하는 세계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에게 이런 최고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과장된 것일까? 아니다.

김지석에 비하면 일천하기 짝이 없는 그 간의 만남과 영화를 통해 판단컨대, 나 역시 김지석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은 그 이상이다. 세계 영화사에 존재해온 모든 영화감독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이라면 독자들은 이해하실까.

다른 지면에도 썼듯, 거장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각별한 감사를 전하는 데 그치질 않았다. 부산영화제의 20년을 지켜온 ‘이 사람’이 없었다면 자기 자신은 말할 것 없고 아시아 영화가 오늘날과 같은 위상에 도달하지 않았을 거라며 공로상을 그에게 바쳤다. 그러면서 그를 무대 위로 청했다. 지금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깜짝 이벤트였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아니면 상상조차하기 쉽지 않았을 감동적 해프닝이었다.

시쳇말로 짜고 친 고스톱 아닐까? 아니었다! 시상식 후 확인해본즉 김지석 본인조차도 그 이벤트를 모르고 있었다. 김지석은 결국 시상자로서 준비했던 시상의 변을 수상 소감으로 ‘둔갑’시켜 자연스럽게 연출했던 것이다. 거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기념비적 해프닝을 연출한 것이다. 첫 걸음인 싱가포르영화제가 내게 남긴 가장 인상적 순간이었으며, 평생 잊지 못할 흐뭇한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거장의 아주 특별한 영화 수업이자 인생 수업이었다.

제26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 공로상 시상 중 마흐말바프 감독의 청으로 무대에 올라온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인사하고 있다.
제26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 공로상 시상 중 마흐말바프 감독의 청으로 무대에 올라온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인사하고 있다. <사진=전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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