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보기] ‘스타일의 노예’ 거부하는 아시아영화 세 거장
봉준호-지아장커-마흐말바프의 공통점
2013 아메리칸필름마켓(AFM, 11월6일~13일) 참석 차 미국에 머물고 있는 요 며칠 새 세 명의 감독이 똬리를 틀고 앉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국의 봉준호, 중국의 지아장커(賈樟柯),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 감독이 그들이다. 세 나라는 물론 ‘아시아영화’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명장 내지 거장들이다.
그들은 최신작을 들고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10월3일~12일)를 찾아 각국 대표급 감독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올 BIFF를 한층 더 빛냈다.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선보인 <설국열차>, 아시아영화의 창 <천주정(天注定, A Touch of Sin)>, 와이드 앵글 부문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그의 미소>가 그들 작품이다.
<설국열차>는 비록 국내에서 1000만 고지를 넘지 못하고 930만 관객 동원에 그쳤지만, 봉준호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스타 감독 대열에 입성했음을 웅변하는 증거로서 손색없다. 특히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튼, 존 허트, 제이미 벨 등 세계 배우들을 요리하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다.
봉준호가 <설국열차>를 통해 새로운 출발을 천명했듯 <천주정> 역시 지아장커의 인상적 변신을 예시한다. 타란티노를 연상시키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폭발적 내러티브와 스타일은 2013년 세계 영화계의 센세이션이라 평할 만하다.
지난 해 단편 <주리>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변신을 꾀하기도 한 김동호 BIFF 명예위원장에 대한 50여 분의 다큐 <그의 미소>는 마흐말바프 감독의 전투적 영화 이력에서 다소 비켜서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김 위원장의 오랜 친구인 마흐말바프 감독은 ‘우정 어린 시선’으로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변치 않는 그의 일상과 미소 속에 담아냈다.
위 세 감독이 지금 내 뇌리를 점령하고 있는 까닭은 그들이 연출한 영화가 문제적 수작이라거나, 그 수작들이 선사한 감흥이 커서가 아니다. 그들이 3국의 대표 감독들이어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 3인에게서 일찍이 인지하지 못했던 일련의 공통점을 감지해서다.
영화의 존재이유를 잊지 않는 영화
사실 이들 세 감독은 유사점 못지않게 차이점이 도드라진다. 무엇보다 봉준호와 비교해 다른 두 감독은 흥행 감독은커녕 주류 감독조차 아니다. 이 땅의 메이저 중 메이저인 봉준호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 없을 듯. 지아장커는 중국 영화를 대표한다고 해도, 지독한 비주류의 ‘지하전영’을 통해서다. 제3회 BIFF 뉴 커런츠 수상작인 장편 데뷔작 <소무>를 위시해 2006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스틸 라이프>, 올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천주정>까지 예외가 없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걸작 <클로즈업>(1990) 등에서 보이듯 마흐말바프는 영화감독만이 아니라 시인으로도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으나, 흥행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요 인기다.
1957년생인 마흐말바프는 10대부터 반정부운동을 하다 문화예술 분야로까지 활동영역을 확장한 정치 행동가요 현실참여 예술가다. 그 점에서 이란을 대표하는 또 다른 감독인 키아로스타미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견지해왔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근본주의에 의해 국가통치가 좌우돼온 이란 당국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부인을 비롯해 아들과 두 딸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화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현재 거의 망명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면서 영화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미소>도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때 참맛이 우러난다. 이렇듯 세 감독은 한 데 묶을 일말의 정치적 색채와 강도에서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개인사로 사회와 시대를 발언하다
영화 스타일 면에서도 그들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봉준호의 스타일은 단적으로 친내러티브적이며 역동적이다. 두 감독과는 달라도 정말 다르다. 지아장커는 이번 신작을 통해 봉준호 못잖은 역동성을 뽐냈으나, 그 동안은 ‘정중동’의 성찰적 스타일로 달려왔다. 마흐말바프는 정치적 급진주의부터 비판적 현실주의, 시적 탐미주의(<가베>) 에 이르기까지 셋 중 가장 폭넓은 스펙트럼을 펼쳐왔다. 이러한 개성적 스타일이 세 감독의 영화적 위상을 공고히 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터.
다시 강변컨대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감독에겐 뚜렷한 공통성이 발견된다. 우선은 협의의 정치성을 넘어서는 확연한 사회성이 그것이다. 관조성, 탐미성 등의 외피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의 영화는 개인적 층위를 넘어 사회를 발언하고 지향한다. 크고 작은 사회성이 영화텍스트를 관통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개인을 억압하거나 희생시키질 않는다. 언제나 개인사로 사회를 말하면서, 개인이 살아 숨 쉬는 개체로 존재한다. 결코 구현하기 쉽지 않은 그들의 크디 큰 영화적 덕목이라 일컫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영화를 통해 인물이 처한 시대는 말할 것 없고, 그 인물을 바라보는 관객이 위치한 시대를 목격하고 느끼고 읽게 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공통점이다. 영화는 어느 정도 시대를 반영하거나 시대를 선도해야 마땅하다. 허나 세상의 너무나 많은 영화들이 그런 본분을 망각한 채, 탈·비시대적 탈선에 빠져들곤 한다. 세 감독은 그런 탈선을 허용치 않는다. 시대와 무관한 듯 비치는 영화에서도 한결 같다. 시대적 기호로서 영화의 역할, 기능을 잊지 않는다는 것, 그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그들의 공동 덕목은 그러나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들이 ‘태도로써 영화’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그런 영화를 빚어내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 태도로써 영화? 그것은 맹목적 영화 지상주의나 순혈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영화의 존재 이유나 목적을 잊지 않는 영화를 일컫는다. 영화 속에서 사람과 삶과 죽음이 생동하는 영화. 세 감독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영화 스타일의 노예가 되는 법이 없다. 영화적 현학을 과시하는 법도 없다.
태도로써 영화는 그들의 일상적 태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 사례를 이 지면에서 들긴 주저되나, 인간을 향한 일말의 예의, 배려 등을 통해 그런 태도와, 태도로써 영화를 통해 그들은 우리들에게 사유를 권유하고 자극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은가. 감격스럽지 않은가. 그들이 아시아영화의 창조자라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