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보기] 매혹의 에로틱 경지 넘어선 인도 춤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작…신선한 도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10월 3~12일)는 지난해(75개국 304편)보다 다소 적은 70개국 301편을 선보인다. 전체 참가국과 출품작은 줄었지만 프리미어 수는 5편 늘어난 137편이다. 월드 프리미어 95편(장편 69편, 단편 26편),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42편(장편 40편, 단편 2편)이다. 상영편수는 줄었는데 프리미어 편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BIFF의 국내외적 위상이나 초청 경쟁력 등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함축한다.
괄목할 만한 다양성 확대, 신예 감독들의 약진 등 과거 그 어느 해에 비해 말할 거리들이 많지만 올 BIFF의 경향·방향 등을 상술할 생각은 없다.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픈 건 개·폐막작 선정의 신선함 혹은 의외성이다.
속 깊어진 아시아영화의 플랫폼
우선 폐막작 이야기. 그 이름도 생소한 한국 감독(김동현)이 연출했다.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낯선 배우들이 주·조연으로 출연하는 저예산 독립영화 <만찬>(The Dinner)이 2013 BIFF를 끝맺음하는 중책을 짊어졌다는 점에서 적잖이 이례적이다. 그동안 한국영화가 BIFF의 폐막을 장식했던 것은 모두 네 차례다. 박기형 감독, 심혜진 김진근 주연의 <아카시아>(2003년, 8회)를 필두로 변혁 감독,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 엄지원 주연의 <주홍글씨>(9회), 황병국 감독, 정재영 수애 유준상 주연의 <나의 결혼 원정기>(10회), 윤종찬 감독, 현빈 이보영 주연의 <나는 행복합니다>(13회)다. 감독이건 출연진이건 <만찬>처럼 미지의 인물들로 가득한 적은 없었다.
명색이 평론가라면서 나는 김동현 감독의 이름을 그저 어렴풋이만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한 것은 1995년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조감독으로였으며, 단편 <배고픈 하루>(2004)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등의 사실도 BIFF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됐다. 하지만 그가 연출한 두 장편 <상어>와 <처음 만난 사람들>은 2005년과 2007년 BIFF에서 공식 상영됐다. 장편 데뷔작 <상어>는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소개됐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BIFF 아시아영화펀드(ACF) 지원을 받아 완성됐으며,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 Award)을 받았다. 그 동안 감독은 탄탄한 연출력을 인정받아왔던 것.
<만찬>의 영예는 어쩌면 예견됐던 셈이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할 법한 가족의 불행과 불운을 집요한 관찰력으로 재현해낸다”는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을 “훌쩍 뛰어넘는 무르익은 연출력을 선보인다”지 않는가. 또 “가족멜로드라마의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냈다”지 않는가. 흔치 않은 상찬이다. 그 선정이 이례적이건 예견된 것이건 간에, 영화에 남다른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만찬>을 폐막작으로 선택한 것은 그러나 개막작에 비하면 참신하거나 의외라고 평할 바 못 된다. 1961년 부탄 태생의 환생한 ‘존귀한 분’, 즉 린포체(Rinpoche)이자 영화감독인 키엔체 노르부의 세 번째 장편 극영화 <바라: 축복>(Vara: A Blessing)! 부탄 왕국에 영화감독이, 영화가 존재한다? 한 편의 영화가 당장 떠오른다. 2000년 6월 국내에서 개봉된 <컵>이다. 승려가 되기 위해 히말라야의 한 사원에 들어가지만 한창이던 월드컵에 서서히 빠져드는 동자승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코믹 휴먼 드라마.
<컵>은 부탄 최초의 장편영화이자 티베트어로 만들어진 첫 영화다. 199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돼 선보이며 “최고의 티베트 불교 영화” 등의 세계적 찬사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로써 부탄에도 영화가, 그리고 영화감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칸 이후 영화는 몬트리올, 토론토 등을 거쳐 BIFF에서도 선보였으며,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FIPRESCI Award)을 수상했다. 그 영화의 감독이 다름 아닌 키엔체 노르부였다. 가히 부탄영화의 대명사라 할 명장이다.
부탄 ‘린포체’ 감독의 글로벌 프로젝트
다시 말하건대 그는 영화감독 이전에 티베트 불교의 귀한 존재인 린포체다. 7살 때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잠양 켄체 왕포(1820∼1892)의 세 번째 환생자로 판명됐다. 그가 종사르 켄체 린포체, 종사르 잠양 켄체 등으로 불리는 것은 그래서다. 그는 인도 샤캬대 재학 중 우연히 TV를 통해 접한 발리우드 영화 한 편으로 영화에 심취하게 됐다. 불교 수행과 함께 영화 공부를 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를 만나 <리틀 부다>의 고문을 맡으면서 영화에 입문했다. 그 이후 <컵>과 <나그네와 마술사>(2003)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저서 <행복의 경제학>을 영상으로 기록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등을 연출했다.
그는 지난 8월 초순 한국에 다녀갔다. 7월에 출간된 <우리 모두는 부처다>(팡세) 홍보차였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신작이 올해 BIFF를 통해 관객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신작이 개막작이다. 인도의 저명한 소설가 수닐 강고파디아이(Sunil Gangopadhyay)의 단편 소설 <피와 눈물(Rakta Aar Kanna)>을 바탕으로 감독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미국·홍콩·대만·인도·영국 스태프들이 함께 작업한 글로벌 프로젝트다.
카타크, 마니푸리, 카타칼리와 더불어 인도의 4대 전통춤으로 일컬어지는 바라타나티암(Bharatanatyam)을 매개로 데바다시(Devadasi, 신의 하인)인 어머니에게 춤을 배우는 아리따운 처녀 릴라의 이뤄지지 않는 사랑과 자기희생, 불굴의 의지 등을 극화했다.
인도의 한 작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에는 발리우드 영화들처럼 매혹적일 대로 매혹적인 춤과 노래들이 관통한다. 그 매혹을 음미하는 맛이 여간 강렬하질 않다. 때론 에로틱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느 발리우드 영화들과는 달리 그 매혹이 그저 스펙터클적 층위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의미의 차원으로까지 비상한다. ‘바라타나티암’은 단순한 춤 그 이상의 것이다. “이제껏 춤을 이렇게 창의적으로 해석한 작품은 없었다”는 BIFF 프로그래머의 진단이 과장만은 아니다.
BIFF는 그 동안 아시아 영화의 허브이자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해 해왔다(는 것이 중평이다). 올 개·폐막작은 BIFF의 외연이, 나아가 아시아 영화의 겉과 속이 한층 더 커지고 깊어졌다는 증거로서 손색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