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보기] 한국영화 자존심 상처낸 칸의 ‘경고’

66회 칸 영화제 초라한 성적표 이유는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가 올 제66회 칸영화제 단편 경쟁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기념비적 성취다. 고 조은령 감독의 <스케이트>가 1998년 이 부문에 첫 입성한 이후, 수상의 영예는 1999년 심사위원상을 받은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유일했다. 올해는 단 한 편의 한국 장편영화도 초청받지 못해 그 성취가 더욱 빛을 발했다.

한국 장편이 경쟁 및 비경쟁, 주목할만한 시선 등 공식 섹션은 말할 것 없고 비공식 병행 섹션인 감독주간, 비평가주간에조차 부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을 넘어 충격이라 할 만하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2000년 경쟁부문에 첫 초청된 이래, 그런 경우가 2001년과 2003년 단 두 차례여서만은 아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가 아시아영화의 대세인 현실에서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서다.

지난해 한국 영화의 산업지표는 기록적이었다. 연 관람객수 세계 6위(1억9500만 명), 다큐 포함 장편 제작편수 7위(229편), 극장 기준 매출총액 8위(13억1000만 달러) 등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산업적으로만이 아니다. 이창동, 박찬욱, 김기덕, 홍상수, 김지운, 임상수, 봉준호 등 해외에서도 신작이 기대되는 스타감독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을 향한 국내외 영화제의 러브콜은 치열할 대로 치열하다. 그런데도 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걸까?

영리추구 일방통행에 문화논리는 뒷전

우선 위 스타감독들의 신작들이 없거나, 칸을 찾을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면 출품했는데, 칸의 취향에 부합되지 않았든지. 당장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부터가 후반작업 중이었다지 않은가. 또 다른 이유는, 유능한 신인감독들이 더디게 출현하고 있고, 설사 출현하더라도 칸을 매혹시킬 만큼의 수준급 문제작들이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 이유를 들어 지나친 상업주의로 치달으며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소멸돼가고 있는 한국영화계를 향해 날리는 일침이 적지 않다. 칸이 우리 영화계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라면서.

시의적절한 지적이요 비판이다. 소수 대형 투자·배급사들에 의한 과도한 독과점, 날로 심해지는 빈익빈부익부, 산업적 호황을 무색케 하기 충분한, 열악한 스태프 처우 등 한국 영화계가 영리 추구 및 약육강식 논리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문화 논리는 찾아보기 거의 불가능하다.

싱가포르 영화(앤서니 첸의 <일로일로>)가 황금카메라상을 차지했다는 데 눈길을 주면 위 일침은 한층 더 큰 설득력을 띠고 다가온다. 아는가? 지난해 그 경제 강소국의 장편 제작편수가 고작 12편, 자국 영화 점유율이 4%에 지나지 않았음을? 통계수치가 발표된 아시아 국가 중 최저치다. 헌데 감독주간에서 선보인 영화가 한국영화는 아직 받아보지도 못한 최우수신인감독상을 가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의 ‘경고’는 자존심이 심히 상한다. 칸 프로그래머들의 선정을 최대한 존중한다 해도 그 선정이 영화의 절대적 척도일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따름이다. 칸의 권위?위상으로 볼 때 물론 그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년 또 그 이후로 어떤 양상이 펼쳐질 지는 두고 봐야 한다. 서른 살 젊은 감독이 한 문화재단에서 지원받은 500만 원에 사비 800만 원을 보태 생애 세 번째로 연출한 13분짜리 단편으로 세계 최고 영화제 단편부문 최고 영예를 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년 전 전작 <불멸의 사나이>로 비평가주간을 찾은 바 있는 감독 자신도 이번이 마지막 칸 행일 거라 여기고 마음을 비웠었다지 않는가.

스토리텔링, 완급조절 빼어난 수작 ‘세이프’

이번에 칸에서 선보인 한국 단편 세 편은 한국영화의 어떤 위상을 증거하기에 모자람 없다. <세이프>는 불법 사행성 게임장 환전소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극적 사건을 극화했다. 아르바이트 여대생, 환전소 주인, 남자 고객 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개인사를 통해,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거대한 힘을 말하는 메시지부터가 인상적이다. 더 큰 주목거리는 그처럼 거창한 메시지를 영화적(cinematic) 기법으로 구체화시켰다는 것이다. 연기의 맛은 기본,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뻔히 알 법한 상황이 펼쳐지는데도 다음이 궁금해진다.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완급 조절이 기대 이상이다. 감독이 손수 했다는 편집리듬이 그만큼 빼어나다.

들어갈 때와 빠질 때를 아는 음악효과 등 사운드 연출은 여느 잘 만든 장편 수준작이 부럽지 않다. 빠듯한 예산으로 인해, 게임장을 구현할 수 없었던 영상적 한계를 음향으로 극복?승화시켰다. 어느 지면에서도 밝혔듯 여주인공이 환전기에서 돈 세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남자가 손가락을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들과 배경음악을 뒤섞는 연출력이 압권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걸작 <싸이코>의 그 유명한 샤워 시퀀스가 떠올랐던 것도 그 섬세한 음향연출 때문이었다. 이만하면 제인 캠피언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들이 <세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까닭이 수긍되지 않을까. 사회성 짙은 제재?주제를 감독 특유의 개성적 스타일로 형상화했다는 것, 그것이 영어로 ‘안전한’과 ‘금고’의 이중적 의미를 가진 영화 <세이프>의 으뜸 덕목이다.

수상엔 실패했어도 다른 두 편의 한국 단편이 보여준 잠재력도 주목감이다. 김수진 감독의 <선>은 시네퐁다시옹에서 선보였다. 대학재학 중인 학생감독들의 단편을 한 데 모아 경쟁을 벌이게 하는 섹션이다. 올해는 세계 277개 영화학교에서 출품된 1,550편 가까운 후보작에서 추려낸 18편이 자웅을 겨뤘다. 영화는 이웃집 소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선의를 베푸는 여자의 불안을 통해 “선의 의미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의 한계를 묻는”다. <세이프>같은 극적 사건도 없고 연출리듬이 세련되진 않았어도, 극적 긴장감에선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다. 학생영화다운 서툶이 더러 엿보이는데, 외려 풋풋한 느낌을 맛 볼 수 있다.

비평가주간에서 선보인 한은영 감독의 <울게 하소서>. 올 전주국제영화제를 거쳐 칸을 찾았다. 전주영화제 소개에 따르면 “한밤중 어두운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고등학생들이 당면한 출산의 문제를 처연한 감성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다분히 시사적이며 자칫 잘못하면 선정적으로 흐를 수도 있을 소재를,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비감상적 카메라와 장엄한 클래식 음악 등 영화적 장치로 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문병곤 감독과 마찬가지로 김수진, 한은영 감독 또한 한국영화의 미래로서 손색이 없다. 올 칸에 한국 장편이 부재한 데서 발생하는 아쉬움을 날려보내고도 남음이 있을 한국영화의 가능성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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