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아쉬움’ 김기덕 감독···”박찬욱·봉준호 앞서 국제무대 빛내”

김기덕 감독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니어도, 인간의 죽음은 신의 소관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삶과 죽음 간의 경계가 얼마나 얄팍하지도 잘 알고 있다. 50줄에 접어든 이후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까지 줄곧, ‘웰빙’보다는 외려 ‘웰다잉’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렇기에 (일정 정도의 세월을 살다간) 그 누군가의 자연사나 병사를 대할 때마다,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워낙 건강 체질이었던 지라 아들보다도 더 오래 살 것만 같았던 부친이 80대 초반이었던 몇 해 전, 이상 증세를 보인지 한 달도 채 안 돼 저세상으로 떠났을 때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80년대 중반, 모친이 급사했을 때도 그랬다. 하물며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야 굳이 새삼스러울 게 뭐 있겠는가.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이제 문 활짝 열고 편히 떠나시길…그곳에서도 영화만 생각할 터이지만.

그러나 11일(금), 조국 아닌 외국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고인이 된 김기덕 감독의 부고 앞에서는 마냥 담담해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꽤 크고 깊은 친분을 견지했던 박철수 감독이나,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핵심 산파요 지킴이였던 김지석 부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 영화관을 찾기 시작한 초등학교 이래 50여년을 남달리 흠모해온 신성일 스타-배우 등과 영영이별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 평론가와 감독으로서 공식적 관계를 넘어, 추억하지 않을 수 없을 일련의 개인적 인연 때문이다. 미투 사건 등 탓에 싸늘함‧냉소 등의 반응도 공존한다고는 하나, 안타까운 애도를 표하는 것은 그래서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그의 이력을 상술하고 싶지는 않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어도, 나보다 7개월 정도 선배인 김기덕과의 인연은 그의 장편 데뷔작 <악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는 1996년 11월 16일에 개봉되는 바람에 1회 아닌 1997년 제2회 BIFF(10.10~18)에서 선보였으나, 강제규의 <은행나무침대>와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함께 1996년을 한국 영화사의 아주 특별한 한 해로 만든 문제작이었다. ‘문제작’이라고는 하나 애당초 흥행과는 무관했다. “개 쓰레기 강간범들이 만든 개 쓰레기 영화”, “영화도 아님”, “이사람 영화는 사라지길 바랍니다” 등 정당한 비판과는 무관한, ‘극혐’의 비난(이상 포털 다음 인용)들과 더불어 0점이라는 평점 테러를 대거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비평적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다수 일반 관객들이 그랬듯, 그야말로 손꼽을 정도의 극소수 평론가들 외에는 영화를 외면했다. 간단한 줄거리 소개만으로도 그 이유들이 수긍될 만하다. ‘악어’ 용패(조재현 분)는 대한민국의 상징적 공간인 한강변에 살면서 자살한 사람들의 시체를 유기시켜 유족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명실상부한 ‘인간말종’이다. 그의 곁에는 앵벌이 소년(안재홍)과 깡통을 주워 파는 노인(전무송)이 거주한다. 현정(우윤경)이라는 여자가 자살하려 하던 날, 악어는 그녀를 건져내 살려준다. 그 이후 그는, 그녀를 폭행하고 강간하면서 성적 만족을 얻는다. 보다 못한 소년과 노인이 현정을 도망시키려 하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악어를 떠나질 않는다. 악어는 자신 주변을 맴돌며 지켜보는 현정에게, 난생 처음으로 인간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명장 윌리엄 와일러의 <컬렉터>(1965)를 필두로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1990), <그녀에게>(2002) 등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활용돼온,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인간적 호감‧사랑의 모티브이나, (명백한 거짓이었어도) 한때의 ‘동방예의지국’에서 수용되기에는 조심스러운, 도전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도발적인 제재이긴 했다. 게다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세련된 서구적 포스트모더니티와는 거리가 먼, 원색 이미지에 날것 그대로의 스타일상의 거침‧조야함 등이 가세했다. BIFF 프로그래머 노트도 양가적 당혹을 피력했다. “키치적인 감수성으로 만들어 낸 영상이 이채롭다. 영화는 도시 주변부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현실을 다루기보다는 새로운 표현들을 시도해 보는데 주력한다…마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수중 촬영장면은 신선하지만 욕망을 위한 진정한 탈출구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강렬한 영상만이 남을 뿐이다.”

당시 나는, 김기덕의 날것 그대로의 그 거침‧조야함이 싫지 않았다. 강제규, 홍상수와는 다른 김기덕 그만의 예술적 취향‧지향으로 다가섰다. 김기덕 영화세계의 어떤 진수가 전달됐다고 할까. 인정하건 않건 간에, 삶에 내재된 인간 존재의 극악무도한 잔혹성‧폭력성을 소위 잔혹미학적 스타일로 포착‧묘사‧구현한 것 말이다. 영화적 수준 차는 날지언정, 그렇다면 <악어>는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이나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2010) 등의 문제적 수‧걸작들을 선취한 것은 아닐까. 이렇듯 상기 극소수 가운데 다름 아닌 내가 포함돼 있었다. 이쯤 되면 개인적 인연을 추억한다 한들, 고인을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찬사를 보내는 처사는 아닐 듯.

김기덕의 다음 영화들이 궁금했다. 그를 향한 나의 관심‧호의는 계속됐다. <악어>보다는 한층 더 대중적 화법을 구사했건만 외면을 넘어 처절하게 무시 받은 <야생동물보호구역>(1997), “‘매춘부 여성론’을 인간 이해의 근간으로 삼은 한국 영화의 우울한 전형을 보여준다”(유지나)는 등의 이유로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으로 선정되는 등 혹평을 비켜가진 못한 비평적 출세작 <파란 대문>(1998)으로. 새 밀레니엄을 맞아 필자를 비롯해 유지나, 강한섭, 변재란, 심영섭 등 동아일보에서 개봉 영화 평가를 맡고 있었던 평론가 6인에게 의뢰, 3편 이하의 영화를 만든 신인 감독 가운데 선정한 ‘21세기의 한국 영화감독’ 5인 중 김기덕에 대해 간략한 감독론을 쓴 것 또한 그와의 특별한 인연이다. 나머지 네 감독은 이창동 장진 이정향 임상수였다.

그때 그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만큼 원고의 일부를 옮겨보련다. 김기덕이 “강제규 장윤현 이광모 홍상수 허진호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리 영화를 이끌 5인의 감독’에 선정된 것은 <악어> 이래 내심 그를 성원해온 필자에게도 뜻밖의 일이었다. 특히 드라마 구성 및 전개에서 드러나는 치명적 약점 내지 개성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그는 소위 작가영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열린 형식이나 내러티브 실험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분명히 대중 상업영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대중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이야기의 설득력’과 ‘개연성’을 보란 듯이 무시한다. 자칫 어설퍼 보일 수 있는 생략과 강조를 주저하지 않고 감행한다. ‘영화는 장르에 따라 이미 작위적이다. 없지만 있을 수 있는 사실 이상의 상황 설정은 필수적이며 그것이 영화의 묘미일 수 있다’는 소신에서 비롯된 ‘삐딱함’이다. 필자에겐 감독 특유의 개성으로 비치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전체적 완성도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 균열은 결정적으로 영화의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에는 위의 흠들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빛나는 미덕들이 당당히 버티고 있다. 화가 출신답게 탁월한 색채감과 화면 구도, 거듭된 참패는 아랑곳없다는 듯 줄곧 저예산 영화만을 고집하는 흔치 않은 뚝심 등은 큰 덕목이다. 그러나 이 땅의 숱한 소모적 감독들이 넘볼 수 없는 으뜸 미덕은 등장인물의 성격화(characterization)이다.

창녀와 백수건달 등 밑바닥 인생을 사는 그의 영화 속 인물들에게선 여느 영화 주인공들에게서 흔한 매력을 찾을 수 없다. 공감하고 동정하기엔 왠지 거북스럽다. 그렇다고 그들을 증오하거나 거부할 수도 없다. 그들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때론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보는 평면적이고 죽은 캐릭터들이 아니라 관계망을 통해 변화하는, 살아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처럼 ‘초라한’(?) 인물들이 서서히 변화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진정 놀라운 체험이다.”

<해안선>(2002), <활>(2005), <아리랑>(2011) 등에서는 크고 작은 실망을 맛보았으며, 어느 페미니즘적 성향의 여성 평론가에게는 “당신은 김기덕 평론가냐?”라는 힐난까지 듣기도 했으나, 김기덕을 향한 내 애정‧지지‧인연은 <피에타>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2012년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바로 그 영화. 그리고 <뫼비우스>(2013)를 기점으로 김기덕은 내게 과거의 감독으로, 점차 멀어져 간다. 카자흐스탄에서 연출한 유작 <딘/디졸브>(2019)는 개봉되지 않았으니, 언급하지 말자. <일대일>(2014), <스톱>(2015), <그물>(2016), <포크레인>(2017),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2017)까지 <뫼비우스> 이후 빚어진 영화들은 태작‧졸작에 가깝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그럼에도 어느 매체에 보낸 총평에서 말했듯, 그는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으로 한국영화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기 이전까지 해외에서 그 누구보다 인정‧각광 받았던 감독이었고, 한국영화를 빛낸 주요 감독 중 한명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사실은 단적으로 2015년 제20회 BIFF 때 출간된 『아시아영화 100』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전 세계 감독, 평론가, 영화학자, 영화기자 등 73명의 전문가들에게 받은 ‘TOP 10’ 리스트를 취합‧합산해 최종 113편의 영화와 104명의 감독을 선정‧발표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이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공동으로 12위에 오른 것.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과 공동 10위에 마크된 <하녀>(김기영, 1960)에 이어 한국영화로는 최상위다. 더욱 놀라운 결과는 감독 순위다. 인도 리트윅 가탁 감독과 나란히 13위로 뽑혔다. 한국 감독으로는 최정상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그것도 고작 한 편으로. 놀랍지 않은가.

25편에 달하는 김기덕의 장편 전작(全作)을 다 본 것은 아니다. 관람한 20여 편 중 개인적 최애작은 <빈집>이다. 저예산에도 최고 완성도를 구현한 2004년 베니스 감독상 수상작. 지난해 한국영화 (제작) 100주년을 기려 꼽았던 나만의 한국영화 100선에 포함시킨 영화도 그 한 편이었다. 하지만 고인을 추억하며 새벽에 다시 찾아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최고의 아시아영화로 모자람 없다. 싱가포르 평론가 필립 치아도 평했듯, 영화는 “대개 불교적으로 해석되지만,…본질적으로 불교적이지 않고 김기덕의 영화 경향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다. 한 편의 철학적 변주이자, 폭력성이 약간 완화된 영화일 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결국 불교영화의 외양을 빌려 인간의, 삶과 죽음의 본성‧본질 속으로 김기덕 특유의 개성‧스타일‧야심으로 설득력 있게 파고든 문제적 성찰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결말부가 떠오른다. 영화의 두 번째 봄에서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좌정해 스스로 목숨을 끓는 노승 캐릭터와, 몸소 노승으로 분해 연기했던 김기덕 감독이다. 황망하게도 그는 목하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저 세상 사람이 됐으나, 그가 계획했던 죽음은 그 노승의 그것 아니었을까? 미투 사건으로 얼룩졌을지언정, 가끔씩은 그의 삶과 영화, 그리고 죽음을 추억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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