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3칸 통신①] 여성·다양성·세대조화·통합···핵심 화두 어떻게 풀까?
16일(현지 시간) 저녁 76회 칸영화제가 12일 간의 대장정을 내딛었다. 개막작은 프랑스 배우이자 감독인 마이웬의 여섯 번째 장편 <잔 뒤 바리>였다. (엠마뉘엘 베르코에게 2015년 칸 여우주연상을 안긴 그녀의 전작 <몽 루아>는 국내에서도 왓챠 등에서 볼 수 있다.) 영화는 고작 5세에 즉위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의 섭정을 포함 재위 기간만 59년(1715~74)에 달했던 프랑스 국왕 루이15세와, 그의 마지막 애첩이었던 ‘바리 (백작)부인’(1743~93) 간의 러브스토리와 당시 프랑스 궁정 풍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대극이다.
잔 뒤 바리 역을 감독이 직접 연기했으며, 루이15세는 전 부인 배우 앰버 허드와의 법적 분쟁으로 <바바리안>(2021, 치로 구에라 감독) 이후 연기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으나 지난해 6월 소송에서 승소한 조니 뎁이 맡았다. 조니의 화려한(?) 복귀작이 세계 최고 위용을 자랑하는 국제 영화제의 문을 여는 데다 그가 칸에 참석한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영화는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령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의 주연 중 한 명인 아델 에넬은 “칸 영화제가 성폭력범들을 축하한다”며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고. 그에 개막 전날의 기자 간담회에서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칸이 정말 성폭행범들의 축제라고 생각하냐?”고 반문하며, “만약 조니 뎁이 연기를 금지 당했거나 영화 공개가 금지됐다면 여기서 <잔 뒤 바리>에 대해 말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생각의 자유와 법적 테두리 안에서 표현과 행동의 자유가 우리의 규칙”이라고 덧붙이면서….
위와 같은 논란들은 차치하고 평하면, 올 칸 개막작은 성공적 선택이었다. 2011년 64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장 뒤자르댕)과 2012년 84회 미국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의상상 5관왕에 오른 <아티스트>를 감독한 명장 미셸 아자나비시우스의 신작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2022년의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프랑스에서도>와는 그 수준이 아예 다르다.
‘계몽주의 시대의 장엄함과 퇴폐’를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구현한 수려한 미장센과 음악 연출이나, 비장미와 유머를 고루 겸비한 희비극적 톤 앤 매너 등 영화의 기본적 덕목에 대해선 상술하진 않으련다. 무엇보다 마이웬과 조니 뎁의 협업이 단연 주목할 만하다. ‘팀 버튼의 페르소나’ 정도로 여겨지며 그간 악동적 이미지가 강했던 조니 뎁은 어느덧 환갑을 맞이하면서, 더 이상은 불가능할 원숙할 대로 원숙한 입체적 연기를 선보인다.
잔 뒤 바리의 실제 ‘미모’(?)와는 거리가 멀기에 처음엔 ‘연출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싶었던 마이웬은 말로 형용키 쉽지 않은 ‘치명적 매혹’을 맘껏 발산한다. 조니 못잖은 고도의 집중력과 복합성 등을 두루 겸비한 열연을 과시하는 것. 그 둘의 개별 연기와 ‘케미’를 즐기는 맛만으로도 영화는 들인 시간?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성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그러나 그 두 주인공의 성격화(Characterization), 즉 인물해석이다. 나무위키 등의 자료에 따르면, 루이15세는 문란한 사생활은 말할 것 없고 심각할 대로 심각한 부채, 무엇보다 국왕으로서 지녀야 할 결정적 리더십의 결핍 등으로 인해 프랑스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암군’으로 알려져 있다. 뒤 바리 부인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축으로 전개됐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등의 여파로 인해, 흔히 악랄하고 거만한 ‘요부’(Femme Fatale) 정도로 묘사돼온 것이 현실이다. 반면 잘생긴 외모와 나쁘지 않은 인성에 지식과 문화적 감각가지 곁들인 남자였으며, 순진한 시골처녀 같은 따뜻하고 소탈한 인품을 가지고 있던 여자였다는 등의 기록도 있다. 잔은 “국왕의 애첩으로 실질적인 나라의 안주인이 된 이후에도 선량한 성격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호감을 샀”고, “요컨대 벼락출세한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인물이었다.”는 것. 그래 루이15세도 잔 뒤 바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데, 흥미롭게도 영화는 그들의 ‘진실한 사랑’에도 초점을 맞춘다.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해 왕의 애첩이 됐다 천연두에 걸려 왕이 죽자 다시 예의 수녀원으로 되돌아가는 잔의 인생 여정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영화는 그녀가 중독적 독서로 성에 눈 뜨고 원치 않았던 수녀원에서 쫓겨나, 끝내는 ‘창녀’(Courtesan)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잔의 모습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그린다. 애당초 진실과는 무관했을 두 실존 인물의 관계가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며 사랑하다 왕의 죽음으로 결별을 고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맛 또한 결코 얕지 않다. 영화의 제목이 ‘뒤 바리 부인’이 아니고 ‘잔 뒤 바리’인 이유에 수긍하지 않을 도리 없다. 감독이자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한 마이웬의 ‘여성 선언’이랄까. 이쯤 되면 왜 굳이 감독 자신이 잔 역을 연기한 건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칸 특유의 열띤 레드 카펫에 이어, 명배우 키아라 마스트로얀니 사회로 저녁 7시 22분부터 35분가량 진행된 올해 칸 개막식의 주인공은 그러나 개막작을 빚어내는 데 함께 이들도, <더 스퀘어>(2017)와 <슬픔의 삼각형>(2022)으로 역대 9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자인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 루벤 외스틀룬드를 비롯한 9인 심사위원단도, 개막 선언을 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 세기의 디바 카트린 드뇌브도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인 8순 직전의 마이클 더글러스였다.
<위험한 정사>(1987)부터 <월 스트리트>(1987), <블랙 레인>(1989), <원초적 본능>(1992) 등을 통해 일찌감치 세계 영화계에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연기 거목’. 여걸 우마 써먼의 간결하고 멋진 소개로 등장한 그는, 감격에 겨워서인지 10분은 족히 넘을 다소 ‘장황한’ 수상의 변을 토해냈고 식장을 가득 메운 객석은 의례적 박수를 뛰어넘는, 짧지 않은 기립 갈채로 환호했다. 경쟁작 공식 상영 때 아니면 쉽게 목격하기 힘든, 칸의 위엄을 증거하기 부족함 없는 그날의 진풍경이었다.
마이클 더글러스는 개막 선언을 하기 위해 무대에 나왔으면서도 간단한 소감만 전한 채, 정작 그 본연의 임무(?)을 잠시 깜박하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고 다시 수습하는 해프닝을 벌인 카트린 드뇌브와 더불어 올 칸의 개막을 선언했다.
지금 이 순간 칸 개막식이 남긴 또 하나의 강렬한 인상은 칸만의 맛을 잃는 법이 거의 없는 개막 공연이다. 벤 E. 킹이 불러 1961년 발매됐으며 그 이후 수도 없이 리메이크돼온 미국 팝의 명곡 중 명곡 <스탠 바이 미>였다. 사회자에 의해 가브리엘이라고 호명된 (흑인)가수?아무리 찾아도 정보를 찾을 수 없다?가 밴드에 맞춰 불렀는데, 여태 들어본 적 없는 천상의 가창력이요 솜씨였다. 나는 한 동안 그 가수가 남긴 감흥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래저래 2023년 올 칸은 개막식과 개막작부터, 그 어느 해 못잖은 재미와 의미, 배움을 안겨주지 않을까 싶다.
2023년 칸은 여성, 다양성, 세대 조화·통합, 영화의 미래 등 몇몇 핵심적 화두를 던지며 첫발을 딛었다. 개막작도 그렇거니와 21편의 경쟁작, 한국계 미국 애니메니션 감독 피터 손이 총감독을 맡은 폐막작 <엘리멘탈>, 그리고 비록 경쟁 부문엔 한 편도 없지만 두 편의 단편을 포함해 총 7편의 한국영화들이 일으킬 크고 작은 화제성 등 그 어느 해 못잖은 짜릿한 영화제로 달릴 공산이 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