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4 칸영화제①] 12일간 대장정 개막작 ‘더 세컨드 액트’

제7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72)

77회 칸영화제, 12일간의 대장정…개막작은 블랙코미디 <더 세컨드 액트>

[아시아엔=칸/ 전찬일, 영화비평가]  14일 저녁 7시 20분(현지시각 기준)을 기해 제77회 칸영화제가 12일 간에 걸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개막식은 프랑스 여배우 카미유 코탱(<마법에 빠졌어요, 2019>, <스틸워터, 2021>)의 사회로 펼쳐졌다.

초미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경쾌하게 출발한 사회자는, 경쟁 부문 심사위원 9인을 한 명 한 명 호명했다. <플라워 킬링 문>의 여주인공 릴리 글래드스톤, <몽상가들>과 <007 카지노 로얄>, <움>의 히로인 에바 그린, <언터처블: 1%의 우정>의 명배우 오마르 시, <어떤 가족>과 <브로커>, <괴물> 등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이었다.

칸의 전통이 그렇듯, 40분 가량 진행된 개막식 전반부 주인공은 <레이디버드>와 <작은 아씨들>, <바비> ‘세 편의 연출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는 심사위원장 그레타 거윅이었다. 2024 칸은 배우로서 그녀를 스타덤에 등극시킨 <프란시스 하>(2012)부터 <바비>(2023)에 이르는 대표작 영상들을 대거 선보이며, 그 젊은 명장에게 최상의 경의를 표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떠오르는 신예 싱어송라이터 자오(-아가테 르 모니에) 드 사가잔에게 <프란시스 하>(와 레오스 카락스의 <나쁜 피>)의 OST로도 유명한 데이비드 보위의 명곡 ‘모던 러브’ 공연을 펼치게 하면서, 개막식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레타가 감격의 눈물을 훔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웠다.

그 열기는 쥴리에트 비노쉬가 등장해 조지 루카스, 스튜디오 지브리와 나란히 명예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는 메릴 스트립을 불러내자 한층 더 달아올랐다.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매운 손님들은 기립박수를 통해 현존 세계 최고의 배우를 맞이했는 바, 메릴이 손사래를 치며 퇴장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게 할 정도로 그 갈채는 뜨겁고 길었다. 쥴리에트는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목소리는 우리 삶의 일부다. 당신은 우리에게 감정을 느끼게 한다. 당신은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스크린 위에서 당신을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통하는 어떤 흐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배우인 것에 관한 모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네 명의 자식들을 멋지게 키워내는 등 그 이상을 이룩해냈다”며, 더 이상은 불가능할 극한의 찬사를 바쳤다.

<어둠 속의 외침>으로 1989년에 일찌감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나 35년만에 다시 칸을 찾았다는 메릴은, 그에 화답해 역시 감동 어린 소회를 들려줬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 클립들은 청춘 시절부터 50대까지, 70대 중반인 현재까지 마치 섬광처럼 달리는 고속 기차를 창밖으로 내다보는 것 같다면서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의 머리를 가꿔준 스태프 등 아주 특별한 인연의 두 명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 많은 장소들을 기억하고 있다고도 했다. 자신이 칸에 와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함께 작업해온 훌륭한 예술가들 때문이라면서, 지난해 감독상을 수상한 쩐아인훙 감독의 <프렌치 수프>에서의 줄리에트의 호연을 상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그 두 여걸이 개막 선언을 하면서, 올 칸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곧이어 개막작이 상영됐다. 캉탱 뒤피외 감독, 레아 세두, 뱅상 랭동, 루이 가렐, 라파엘 퀴나르 주연의 블랙 코미디이자 영화 만들기 및 (프랑스) 영화 산업과 예술에 관한 풍자적이면서도 냉소적인 ‘메타 영화’ <더 세컨드 액트>이다.

한국 시네필들에게 낯익은 배우들과는 달리 감독(일명 미스터 와조)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낯선 편인데, 뮤지션으로 출발해 촬영과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약해온 팔방미인이다. 어떤 전작들은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볼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2022), <디어스킨>(2019) 등이다. 국내에서 정식으로 볼 수는 없으나, <루버>(영어 제목이 The Rubber인 바 ‘러버’가 정확한 발음이다)는 <광란의 타이어>란 제목으로 2011년 1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선보여 부천 초이스 장편 경쟁 부문 최고상을 받았다. “‘살인마 타이어’라는 미친 상상력 하나만으로 장르영화의 긴장과 재미를 말쑥하게 만들어내는” 영화는 “별 다른 특수효과 하나 없는 저예산 독립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영화”라는 평가(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32555)를 받기도 했다. 차기작 <롱>도 ‘이건 아니지’란 제목으로 2012년 부천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더 세컨드 액트> 한 장면

이런 정보‧맥락에서 보면 <더 세컨드 액트>는 눈길을 끌기에 모자람 없다. 네 중심인물들이 영화 제목과 같은 상호를 단 외딴 바이자 레스토랑에서 만나며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들에 혹할 만하다. 미친 듯이 사랑하는 남자 데이비드를 아버지 기욤에게 소개하고 싶어하는 플로렌스. 하지만 데이비드는 플로렌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를 친구 윌리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때내려 애쓴다. 여기에 스테판(마뉘엘 기요)이란 이름의 레스토랑 주인장의 에피소드가 끼어들며, 영화의 의외적 재미와 의미를 한껏 제고시켜 준다. 영화 안에서 PTA(폴 토마스 앤더슨)나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감독 이름들을 듣는 함의도 가볍지 않다. 한데 영화 <세컨드 액트> 안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영화일까 현실일까? 누군가에게는 ‘영화는 영화’지만 누구에게는 ‘영화는 현실의 연장’ 아닐까…

<더 세컨드 액트>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결코 가벼이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그러한 육중한 문제의식을 무겁지 않게 극화한다. 수미쌍관식으로 영화의 도입부와 결말부를 장식하는, 움직이는 롱테이크 시퀀스들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좋은 배우들의 연기는 즐기기에 부족함 없다. 그들이 구현한 성격화들도 그렇다.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대화들을 지켜보는 맛도 얕지 않다.

찬란했던 영화의 과거를 가능한 최대한 상기시키고, OTT 등의 급부상(이 영화에도 넷플릭스가 참여했다) 등으로 인해 목하 위기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극장 영화를 지기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써온 세계 최고 권위의 칸영화제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칸의 위용을 감안할 때 그 선택은 인상적이되 신선하거나 열광적 호응을 끌어내기엔 어딘가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다소 심심하다고 할까. 80여 분이라는 상영 시간도 짧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거니와, 허전한 느낌을 준다. 내게는 그랬다. 영화 촬영 때 쓰이는 긴 레일을 롱테이크로 꽤 길게 보여줄 때 ‘설마 저렇게, 끝이 나진 않겠지’ 싶었는데, 그렇게 끝이 나는 게 아닌가. 물론 흥미로웠다. 미처 챙겨보지 않은 감독의 전작들이 궁금해졌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찾아 볼 참이다.

그러나 흥미 그 이상의 강렬한 임팩트로는 나아가지는 않을 공산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드뷔시 홀에서의 프레스 상영장의 분위기도 딱 그만큼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여기저기서 웃음들이 터져 나왔으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는 정작 그 웃음들을 무색하게 하기 충분하리만치 밋밋했다. 메인 상영관 뤼미에르 극장에서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단다. 실은 영화 상영 도중 나가는 이들이 적잖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영화 상영이 끝난 후 북적되기 마련인 프레스센터도 한산했다. 1997년부터 지금껏 23회를 찾은 이래, 그런 광경은 처음이라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하진 않아도 마침 내리고 있는 비가 올해 칸의 분위기를 다소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는데, 그 분위기가 홀 칸을 관통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때마침 올해 칸에 초청된 한국영화 편수도 세 편에 지나지 않는다. 2년 연속 경쟁작을 내지 못했다. 비경쟁 심야 상영 부문에서 첫 선을 보일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와, 칸클래식2024에서 선보일 김량 감독(<경계에서 꿈꾸는 집, 2013>, <영원한 거주자, 2015>, < 바다로 가자, 2020>)의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사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 학생 단편 영화 경쟁 섹션인 라시네프에서 상영될 임유리 감독의 <메아리>가 그들이다. 이 영화들에 대한 소식이나 리뷰는 차차 전하기로 하자.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은 야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가여운 것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더 랍스터>, <송곳니>)의 신작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 등 22편의 경쟁작들의 베일이 한 편 한 편 벗겨지면서, 칸 특유의 열기도 서서히 달아오를 게 분명하다. 올해도 예년처럼 우선적으로 아시아엔 독자들을 위해 다채로운 칸 통신을 전할 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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