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4 칸영화제③] 션 베이커 ‘아노라’ 황금종려상
30년만에 경쟁 부문 진출 인도영화, 심사위원대상 거머쥐어
<에밀리아 페레스>, 심사위원상과 여우주연상 2관왕 파란
미국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가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26일 새벽(한국 시간) 제77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션 베이커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등으로 국내 시네필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명장. 그 깜찍한 수작으로 칸 병행 섹션 감독주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감독은 2021년 <레드 로켓>에 이어 두 번째 경쟁 부문 입성작으로 칸 최고 영예를 차지했다. 미국 영화가 황금종려를 쓴 것은 2011년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이후 13년만이다.
<아노라>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한 여성 스트리퍼 아노라(마이키 매디슨 분)를 축으로 펼쳐지는 코믹 드라마다. 그녀는 러시아 집권층의 아들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남자의 부모가 뉴욕을 찾아 그 결혼을 취소시키려 하면서, 그녀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위협에 직면한다.
공식 상영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감독은, 개인의 신체 사용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근거로 ‘성 노동이 비범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 노동자들의 성매매에 대해 옹호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파격을 일으켰다. “그간 다섯 편이 성 노동자에 대한 영화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과 접촉하고 친해지며 ‘그 세상에는 전할 이야기가 100만 개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후반부에 공식 선보인 영화는 칸 현지에서 가장 널리 참고되는 데일리 스크린 인터내셔널 12인 평단으로부터 평균 평점 3.3점(4점 만점)을 받으면서, 황금종려상 유력 후보로 부상했는바 급기야 수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스크린과 적잖은 차이를 보이곤 하는 르필름프랑세의 15인 평단으로부터도 2.93점으로 3점에 근접하는 호평을 받았다.
<아노라>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폐막 3일 전 칸을 떠나기 전까지 볼 수 있었던 경쟁작 18편-총 22편이었다- 가운데 도저히 입장권을 구할 수 없는 데다 최후의 줄서기를 통해서도 끝내 볼 수 없었던 유일한 한 편이었다(면 이해될까).
칸 경쟁작들을 꼼꼼히 챙겨보고 설득력 높은 리뷰를 전한 한 기사를 참고?인용(https://www.mk.co.kr/news/culture/11024128)해보자. <아노라>는 여로 모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고. “폭소를 이끄는 끝없는 유머 사이로 서늘한 칼날 같은 비판 지점이 명확하기 때문”. 기자는 덧붙인다. “<아노라>가 상영된 뤼미에르 대극장은, 무려 ‘1~2분 간격’으로 폭소가 터질 정도로 웃음바다를 이뤘다. 그러나 <아노라>는 결코 단순하게 해석될 수 없는 영화로 보인다. 권력자(이반과 부친)는 그저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할 뿐이고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며 분투하는 건 여성(아노라)과 하수인 셋(노동자)이어서다. ‘부친-이반-아노라-하수인 셋’이 일련의 계급 구도를 이루는 가운데, 아노라와 하수인 셋이 싸운다는 점에서 <기생충>의 기택 부부와 문광 부부의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이쯤 되면 국내 수입개봉이 확실시되는 영화가 과연 어떤 호응을 일으킬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아노라>의 수상이 충분히 예상된 결과였다면, 2등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은 일대 파란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30여년 이력의 평론가인 내게도 낯선, 인도 태생의 여성 감독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All We Imagine as Light>(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빛)이 그것이다. 필자가 칸을 떠난 23일 밤 10시에 월드 프리미어됐는 바, 스크린 평점에서 <아노라>와 똑같은 3.3점을 얻으며 강력 수상 후보로 점쳐졌었다. 상기 기사의 기자가 “서정시에 가까운 인도영화 한 편이 칸영화제의 마지막 선택을 좌우할 마지막 변수로 떠올랐습니다”라고 적절히 진단(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308737?sid=103)했는데, 그 진단이 적중했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꿈의 도시’이자 동시에 ‘절망의 땅’이라는 뭄바이를 무대로, 말 못할 각자의 사정이 있는 두 여성 간호사가 우여곡절 끝에 해변 마을로 길을 떠나는데, 그곳은 그녀들에게 성장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될 공간이 된다.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그 수상의 의의를 짚는 것으로 대신하련다. 올 칸의 경쟁작 중 여성 감독 연출작이 총 네 편이었다. 그 중 최고상을 가져갔다는 것이 첫 번째 의의다. 지난해는 여섯 편이었고 황금종려상을 여성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울 게 없을 순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차별이 당연시되고 있는 인도 출신의 여성 감독이 프랑스 자본에 인도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자본까지 끌어들여 어렵게 빚어낸 합작 영화가, 그것도 남자들이 아닌 두 커리어우먼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런 성취를 일궈냈다는 것은 가히 ‘기념비적’이라 평해야 마땅하다. 두 번째 의의는, 샤지 N. 카룬 감독의 <스와함>(Swaham: 숙명) 이후 30년만에 경쟁작에 합류해 그런 역사적 쾌거를 일궈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선호 여부를 떠나, 마치 예정된 순서를 밟은 듯한 <아노라>보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빛>의 수상이 더 빛나는 것은 그래서다. 이 영화도 수입돼 10만 관객을 동원한 <추락의 해부> 이상의 호응을 불러내기를 바란다면 과욕일까.
심사위원상은 <디판>으로 이미 2015년 칸 정상에 올랐던 프랑스의 명장 자크 오디아르의 몫이었다. 단언컨대 비범한 문제작 <에밀리아 페레스>였다. 올 칸에서 본 17편의 경쟁작 중 개인적으로 가장 열광했던, 그래 최후의 순간까지 또 다시 칸을 정복하기를 바랐던 걸작이다. 멕시코시티를 주 무대로 텔아비브, 런던, 취리히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을 돌며, 프랑스어가 아닌 가끔씩 쓰이는 영어와 더불어 스페인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야기와 시?청각, 즉 영화의 전 층위들이 거의 완벽한 케미를 구현한 ‘완전 영화’(Total Movie)다. 여성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 분)와, 거대 마약 카르텔 두목 마니타스 델 몬타에서 에밀리아 페레스로 성전환을 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한 남성-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한데 형식은 뮤지컬 스릴러?멜로다. 그야말로 경이로움의 연속인바, 드라마의 극적 호흡은 말할 것 없고 미장센, 음악 효과 등에서 뿜어나오는 매혹들(Attractions)이 압도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것은 마니타스와 에밀리아 역을 동시에 연기하는, 스페인 태생의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52)이다.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8년 전만 해도 스페인 방송과 연극, 광고판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 즉 카를로스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러나 멕시코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2018년 카를로스에서 카를라로 재탄생했다. 그녀에게는 아내가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15살짜리 딸도 있다. 딸에게 아버지이자 엄마이며 친구이기도 한 카를라가 딸 빅토리아를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딸도 그녀에게 열광하며 성원해왔다. 애당초 감독은 두 명의 배우를 캐스팅하려 했다. 하지만 카를라의 설득에 의해 두 배역을 다 그녀에게 맡겼다. 자신의 영화를 ‘해체’시키면서까지.
그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 그레타 거윅을 수장으로 한 올 칸의 경쟁 부문 9인 심사위원단은 칸, 아니 영화제 사상 최초로 성전환 수술로 ‘초-정체성’(Transidentity)을 획득한 여배우에게 세 동료 배우들(조 샐다나, 셀레나 고메즈, 아드리아나 파스)과 나란히 여우주연상을 공동으로 안기는, ‘혁명적 결단’이라 한들 과장이 아닐 파란을 연출했다. 스크린은 이 영화에 2.5점의 평균을 조금 웃도는 평점을 줬으나, 카를라 관련 상기 정보를 사설로 상술한 또 다른 데일리 갈라크롸제트의 12인 평단은 3.6점에 달하는 역대급 평가를 안겼다. 12인 중 8명이 4점 만점을, 3명이 3점을, 1명이 2점을 부여했다.
음악 또한 치명적으로 압도적?매혹적이다. 그저 괜찮은 곡들을 작곡하거나 선곡해 넣으려 애쓰는 여느 그렇고 그런 뮤지컬 영화들과는 그 차원이 달라도 판이하게 다르다. 뮤지컬 영화답게 어느 지점에서 극적 흐름을 노래와 춤 등으로 전환?대체시키지만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하기는커녕 몰입력이 한층 더 커지는 게 아닌가. 프랑스 여성 가수 카미유와, 그녀의 파트너로 편곡자이기도 한 클레몽 뒤콜이 공동으로 작곡했다는 음악은 그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 리듬, 비트, 멜로디, 가사 등으로 전례 없는 감흥을 안겨주는 바, 캐스팅은 연기력 못잖게 노래 실력에 의거해 이뤄졌다고….
감독상은 포르투갈 미구엘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에 안겼다. 1917년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랑군. 대영제국의 공무원인 에드워드(곤칼로 와딩톤)는 약혼녀 몰리(크리스티나 알파이아테)가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도착한 바로 그날 어디론가 도망친다. 에드워드는 여행을 떠나며 공황 상태가 우울증으로 바뀌어간다. 그러면서도 비겁하지만 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한다. 한편, 에드워드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행보에 외려 즐거워진 몰리는 그의 궤적을 따라 아시아 여러 나라를 찾아가는 ‘그랜드 투어’를 떠난다.
위와 같은 줄거리는 사실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일종의 미끼(McGuffin)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까. 영화에서 두 주인공 연인들은 만나지 않는다. 따라서 중심 캐릭터들은 2020년 주로 16mm 흑백 필름으로 촬영한 미얀마,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필리핀, 일본,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7개국을 도는 몰리의 그랜드 투어를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 투어가 서구인들에게 신선하게 비쳤을 수도 있겠으나, 아시아인 시선으로 판단컨대 영화가 부정적 함의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총평이다). 더욱이 그 투어들에는 이렇다 할 내적 논리들도 부재한다. 나이브한 투어의 나열이랄까. 그 어느 해보다 칸 심사위원의 선택에 수긍하건만 동의하지 않는 단 한 부문이 감독상이다. 물론 극영화적 허구와 다큐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와해시키는 등의 실험성은 남다른 주목을 요하는 것은 사실이다.
남우주연상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옴니버스물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에서,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세 배역을 실감 가득 소화한 제시 플레몬스 차지였다. 그와, 알리 아바시 감독의 <더 어프렌티스>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3?40대를 흔치 않은 싱크로율로 체현한 세바스찬 스탠, 혹은 젊은 트럼프의 멘토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우익 변호사이자 정치 브로커 로이 콘 역의 제레미 스트롱 사이의 대결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제시의 승리로 귀결됐다.
2021년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쥘리아 뒤쿠르노 감독)과 연결되는 피범벅(Gore)물이자 바디 호러물로, 선정 이후 줄곧 화제의 중심에 자리했던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더 서브스턴스>가 각본상을 가져갔다. 두 주연 여우 데미 무어와 마가렛 퀄리의 전라를 불사한 열연이 단연 돋보였는데, 예측 불허의 긴박감 가득한 플롯이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은 듯. 다소는 의외로 다가서기도 한지만, 그만큼 더 인상적 결정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참고로 2018년 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 초이스 : 장편 작품상을 받은 감독의 데뷔작 <리벤지>는 왓챠 등에서 관람할 수 있다.
상기 7개 본상 외에 올 칸은 2024년의 특별상을 수여했다. 얼마 전 이란에서 유럽으로 망명했다는 일신상의 이유로 더 큰 화제몰이가 된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성스러운 무화과 씨앗>이다. <사탄은 없다>로 2020년 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등을, <집념의 남자>로 칸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감독은, 이 영화에서 여배우들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징역 8년 형과 태형, 벌금형, 재산몰수형을 선고받은 후 고심에 고심 끝에 자유를 선택해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는 영화 상영 하루 전에 극적으로 칸에 도착했다. 그는 “이란 국민들은 정부에 의해 인질로 잡혀 있다”며,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한 제작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24일 상영돼 역시 보지 못한 <신성한 무화과 씨앗>은 불신과 광기에 사로잡혀, 급기야 아내와 두 딸을 의심하게 되는 테헤란의 혁명재판소의 한 판사를 둘러싼 드라마다.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현 이란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 영화는 스크린 평단으로부터 최고점인 3.4점, 르필름프랑세로부터도 역시 3.27에 가까운 평점을 득하며 막판에 다크호스로 떠올랐으나, 특별상을 안는 데 그쳤다.
경쟁작 수상 결과에 한정하자. 올 칸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2024 칸은 예년들과는 다른, 올해만의 어떤 특별한 경향들을 보였을까. 또 <영화 청년, 동호>와 <메아리> 두 편의 한국영화에 대한 리뷰도 해야 하지 않을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