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3칸 통신⑦] 황금종려상, 프랑스 트리에 감독 ‘아나토미 오브 어 폴’
프랑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가 황금종려상을 안으며, 올 76회 칸영화제가 12일간의 대장정을 27일 마쳤다.
7명의 여성 감독 중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와 나란히 칸 데일리《스크린》 평균 평점 3점을 받으며 “유력 후보로 회자되고 있다.”고, “<흥미의 영역>에도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의 여우주연상과 최강의 짜임새를 자랑하는 각본상 수상이 높게 점쳐지고 있으며, 영화는 그 어떤 상을 가져가도 좋을 올 칸의 화제작 중 화제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중이다”라고 필자가 6탄에서 진단했는데, 그 진단에 부응이라도 하듯 결국 세계 최고· 영화제의 영예를 거머쥔 것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5탄에서 이미 간단히 짚었으니, 더 이상 리뷰를 하진 않으련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2021년 <티탄>으로 칸 정상을 밟은 쥘리아 뒤쿠르노?경쟁 부문 9인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에 이어 불과 2년만에 제76회를 맞이한 칸의 역사상 세 번째 여성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등극했다.
그 첫 주인공은 주지하다시피 1993년 천카이거의 <패왕별희>와 공동 수상한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였다. <추락의 해부>의 쾌거로, 무엇보다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올 칸은 또 한 차례의 유의미한 새 역사를 일군 셈이다.
개인적으로 황금종려상을 가져가길 희망했던 두 영화 중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각본상(사카모도 유지)을 안았다. 반면 <나, 다니엘 블레이>(2016)나 <미안해요, 리키>(2029)의 아류작쯤으로 경쟁 심사위원들에게 다가섰던 걸까, 연대와 힘, 저항의 중요성을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하게 역설한 <디 올드 오크>는 무관에 그쳤다.
2등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은 조너선 글레이저의 <흥미의 영역> 품에 안겼다. 역시 5탄에서 비교적 상술한 바, 더 이상 거론하진 않겠다. 영국 출신 감독은 미국-영국-폴란드 합작 영화로 칸에 첫 입성해, 생애의 큰 쾌거를 일궈내는 데 성공했다. 그 점에서 영화는 2004년 칸 심사위원대상에 빛나는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연결된다.
감독상은 베트남 출신 프랑스 감독 트란안훙(쩐아인훙)의 <도당 부팡의 열정>에 주어졌다. 일찍이 1993년 46회 칸영화제에서 <그린 파파야 향기>로 신인감독상인 황금카메라상을 손에 쥐었던 훙감독에게도 그렇지만 베트남 영화계로서도 기념비적 성취로 평가되기 충분하다. 칸 경쟁 부문 첫 초청으로 3등 상에 해당하는 큰 상을 받음으로써 그간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내고, ‘칸 패밀리’에 입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885년 프랑스를 무대로 한 유명 요리사(쥘리에트 비노쉬)와 요리사 뺨치는 요리 레시피에 통달한 미식가(브누아 마지멜) 간의 20여년에 걸친 우정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느린 호흡으로 그린다. 두 연기 달인의 열연도 눈길을 끌지만, 요리의 나라 프랑스답게 상영 시간 145분 중 수십 분은 요리의 과정에 할애하는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숲 안에 위치한 고즈넉한 저택과 요리, 캐릭터등 사이의 조화미가 기대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데, 그것이 감독상으로 귀결된 것이다.
베트남 영화로서는 겹경사가 이뤄졌다. 감독주간에서 선보인 팜티엔안의 장편 데뷔작 <노란 고치껍질 안에서>가 선배 쩐아인훙에 이어 30년만에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쥔 것. 바야흐로 아시아영화의 선두국가로 간주되고 있는 한국영화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 상을 말이다.
베트남을 향한 애정에서 작심하고 찾아가 관람한 그 3시간짜리 영화는, 주목할만한시선에서 첫 선을 보인 김창훈 감독의 <화란>과 경쟁작 <청춘(봄)> 외에 ‘특별 상영’ 섹션에서 선보인 왕빙의 60분짜리 중편 다큐멘터리 <맨 인 블랙> 등과 더불어 2023 칸의 으뜸 발견이라 할 만했다.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형수의 유해를 가져다주기 위해 거주하던 도시 사이공에서, 그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다섯 살 조카와 함께 고향 마을을 찾는 티엔이라는 이름의 청년을 축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사실 줄거리 소개가 별 의미가 없다. 과거의 기억과 욕망 등에 사로잡힌 주인공에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조차 흐릿하다. 고향에 도착해 사라진 형을 애타게 찾지만,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불분명하다. 영화는 의도 여부를 떠나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러시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이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대만 허우샤오시엔 등 세계 영화사의 숱한 거물들의 영화적 흔적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승화·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감독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나, 기억하건대 없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멀리 떨어진 채 바라볼 뿐 좀처럼 다가가지 않으며, 내러티브 호흡도 완만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이야기가 흐르는 플롯 타임과 그 플롯이 영화에서 펼쳐지는 스크린 타임, 그리고 실제 시간이 동일한 순간들이 적잖이 등장한다. 한데 짧지 않은 세 시간여가 전혀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 예상치 못한 긴장감을 곁들인 채….
영화를 지켜보며 데뷔작으로 이미 ‘대가의 경지’를 이룬 경이로운 작가(Auteur)의 출현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칸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중에 과연 이 정도 수준의 영화가 있는지 자문해 봐도, 내 기억에는 없다. 그래 영화 상영 후 분주한 감독에게 잠깐이나마 대화를 청해 나눴고, 사진도 찍었다.
베트남에서든 부산에서든 어디서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그런 그가 황금카메라상을 쥐다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다시 경쟁 부문 수상작들로 돌아가자. 《스크린》 12인 평단으로부터 3.2점이라는 최고 평점을 얻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낙엽들>은 심사위원상에 만족해야 했다. 감동을 넘어 <추락의 해부>와 <흥미의 영역>처럼 충격적 통찰로까진 나아가지 못해서였지 않을까, 싶다. 두 주연 배우 알마 푀이스티와 유시 바타넨이 대리 수상을 했다.
남우주연상은 개인적으로 수상을 점쳤던, 빔 벤더스 감독의 <완벽한 날들>의 주인공 히라야마를 연기한 일본의 국민 배우 야쿠쇼 코지 몫이었다.
여우주연상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의외의 배우가 차지했다. 튀르키예 누리 빌게 제일란의 <건초에 대하여>의 여주인공 메르베 디즈다르였다. <흥미의 영역>과 <추락의 해부> 두 편에서 압도적 연기를 펼쳤던 잔드라 휠러가 <추락의 해부>로 칸의 여왕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황금종려상을 안을 거라, 가능하면 한 영화에 두 개 이상을 주지 않으려는 칸의 정책에 부응해서 한 선택이 결과 아닐까, 싶다. 이래저래 올 칸은 잊을 수 없는 영화제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