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3칸 통신⑩] 결산(하)…”폐막 3주, 나는 아직도 칸영화제 자장 안에 머물러 있다”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제76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린지 3주가 다 돼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자장 안에 머물러 있다. 과거에도 으레 그랬으나, 올해는 그 파장이 한층 더 크고 깊다.
베트남영화가 선사한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과,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 김창훈 감독 <화란>, 유재선 감독 <잠> 등 7편의 한국영화가 남긴 크고 작은 인상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각본상 수상작 <괴물>과 빈손으로 돌아갔어도 여전한 거장의 숨결·손길을 증거한 켄 로치의 <디 올드 오크>, 여성 감독이 연출한 총 7편의 경쟁 부문 초청작 중 쥘리아 뒤쿠르노의 <티탄>에 이어 2년 만에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등 일련의 경쟁작들이 안겨준 강렬한 감흥, 올 칸이 던진 ‘핵심적 화두’ 등이 그 주된 이유들이다.
앞의 세 이슈들에 대해서는 이미 상술한 바, 넘어가기로 하자. 적잖이 늦어지긴 했어도 하지만, 네 번째 이슈에 대해서는 좀 더 보완·부연하련다.
칸 통신 1탄에서 “2023년 칸은 여성, 다양성, 세대 조화·통합, 영화의 미래 등 몇몇 핵심적 화두를 던지며 첫발을 딛었다”고 진단했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도 역설했듯, 그 진단은 적중했다. 여성(성)과 다양성(다채성)에 대해서는 나름 상세히 소개했으나, 다양성에 관해 조금 더 보태보자.
사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어도, 티에리 위원장은 올 칸의 특징 중 하나로 ‘젊은 감독과 노련한 감독의 작품이 골고루 선을 보인다는 점’(이하 https://n.news.naver.com/article/053/0000036439?sid=103)을 전격 내세웠다.
데뷔작 <바넬과 아다마>로 칸 경쟁 부문에 입성한 세네갈 계 프랑스 감독 라마타 툴라예 씨 같은 신예와, 마틴 스코세이지나 마르코 벨로키오 같은 노 거장의 신작들이 “한 장소에서 함께 선을 보인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돌아왔다는 것도 대단한 뉴스다. 또 난니 모레티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도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 작품과 같은 종류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영화제는 감독 특유의 성질을 고수하는 작품과 함께 새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면서.
그만큼 2023년 칸이 그 어느 해보다 더 다채성에 방점을 찍었다는 의미일 터. 코로나-19로 2020년은 정상 개최가 되지 않았으니 논외로 치자. 칸 경쟁 부문에서 신인의 첫 연출작이 초청·상영된 것은 2019년 라지 리 감독의 <레 미제라블> 이후 처음이다.
주목할만한시선 섹션에 눈길을 주면, 그 수는 10편이나 된다. 지난해에 비해 두 편이 늘었다. 관련해 티에리의 일성은 단연 큰 주목을 요한다. “이 부문은 결코 영화제의 2등 부문이 아니다. 젊은 영화인들, 젊은 10대들이 만드는 예술성 강한 작품, 즉 과격한 새 형태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부문이다. 올해는 출품작을 20편에서 15편으로 줄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20편이 나왔다. 국제적 영화인들의 훌륭한 작품들인데 칠레 영화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다.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은 특정 감독의 첫 작품이 모이는 주요한 수원지이다.” 그 가운데 한 편이 <화란>이었다.
다큐멘터리로 시선을 돌리면, 올 칸의 다양성은 훨씬 더 짙어진다. 왕빙의 <청춘(봄)>과 <맨 인 블랙>, 페드로 코스타의 단편 <불의 딸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으나, 실은 그 정도가 아니다. 다른 지면에서도 피력했듯 “2023년 칸의 도드라지는 경향 중 하나는, 실사 영화에 비해 으레 ‘서자’인 양 취급 받아온 ‘다큐의 비상’이”었다.
아프리카 튀니지 태생 여성 감독 카우테르 벤 하니야의 경쟁작 <올파의 딸들>(네 딸들)도 다큐와 픽션이 결합된 ‘다큐-픽션’이요 ‘픽션-다큐’였다. <팔레르모 슈팅> 이후 15년 만에 일본 영화 <완벽한 날들>로 경쟁 부문에 초대받아 야쿠쇼 코지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빔 벤더스도 왕빙과 마찬가지로 또 한 편을 ‘특별 상영’ 부문에서 선보였는데, 다큐였다. ‘20세기 후반의 신표현주의 미술 운동의 주요 인물’로 간주돼온 독일의 설치미술가 안젤름 키퍼에 관한 <안젤름>이다.
저들 세 편 외에도 ‘특별상영’ 부문에서 4편의 다큐가 더 첫선을 보였다. <헝거>(2008), <셰임>(2011), <노예 12년>(2013)의 명장 스티브 맥퀸이 빚어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관한 4시간 20분여의 다큐 <오큐파이드 시티>, 평론가를 거쳐 브라질을 대표하는 명장의 자리에 오른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아쿠아리우스, 2016>, <바쿠라우, 2019>)의 <유령들의 그림>, 톱스타 마리옹 코타르를 기용해 2016년 자살했다는 감독의 어머니를 소환한 모나 아샤슈의 ‘반(半)-다큐, 반-픽션’ <리틀 걸 블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 권리 문제를 짚는 사흐라 마니의 <빵과 장미>였다.
이렇듯 총 10편이 선보인 특별상영에서 무려 7편이 다큐였는 바, 1997년 첫 방문 이래 26년간 22차례 칸을 찾은 내가 기억하는 한, 다큐의 위상이 이렇게 드높았던 적은 없었다. 세기의 문제적 감독들이 이렇게 다수 다큐로 칸을 공식 방문한 적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다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영화의 존재감도 가히 ‘기념비적’이었다. 두 편의 경쟁작 외에도, 10편이 병행 섹션 포함 전 부문에서 고루 선보였다. (이하 https://www.festival-cannes.com/en/2023/wide-angle-the-pride-of-place-of-african-cinema-at-the-festival-de-cannes 참고·인용) 영화들만이 아니다. 칸 경쟁 심사위원 9인 중 2명이 아프리카 여성 감독이었다.
모로코의 마리암 투자니(<아담, 2019>)와 웨일스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으나 잠비아가 낳은 룽가노 니오니(<나는 마녀가 아니다, 2018>)가 그 주인공들이다. 1975년에 일찍이 알제리 모하메드 라크다르-하미나 감독의 <불타는 해의 연대기>가 황금종려상을 안기는 했어도, 54개 국가로 이뤄진 아프리카 대륙의 영화는 그동안 칸에서조차도 ‘미지의 영화’였고 ‘미래의 영화’이기 십상이었다.
소위 영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기껏해야, <흑인소녀; La noire de…1966>, <물라데, 2004> 등을 통해 ‘아프리카 영화의 대명사’로 여기어져온 세네갈 우즈만 셈벤이나, 아프리카 영화로는 1987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첫 진출해 심사위원상을 가져간 <밝음>(Yeelen) 등을 통해 우스만 셈벤과 쌍벽을 이뤄온 말리 술레이만 시세, 그리고 <팀북투>(2014) 등을 통해 21세기 아프리카 영화의 자존심을 지켜온 모리타니 압데라만 시사코 정도만이 알려졌을 따름이다. 한데 올 칸에서 아프리카 영화의 가능성이 역대급으로 입증된 것이다. 술레이만 시세가 “아프리카 영화인들의 주된 업무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우리들을 따를 세대는 영화의 다른 양상으로 확장돼 나아갈 것이다”라며 1987년에 예언적으로 천명했는데, 그 선언이 ‘마침내’ 현실이 된 셈이다. 수단 영화 사상 최초로 칸에 초대된 모하메드 코르도파니의 <굿바이 쥘리아>가 주목할만한시선에서 일종의 특별상인 ‘프리덤 프라이즈’를 거머쥔 것은 그 좋은 사례로 평가되기 모자람 없다.
세대 조화·통합에 대해서는 이미 티에리 프레모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혀졌지 않나, 싶다. 그 어느 해보다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조화에 힘을 쏟았다는 것. 그것은 칸 경쟁작 심사위원단 구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2022년에는 평균 나이가 45세였는데, 올해는 39세였다. 심사위원장은 무려 15살 차이가 난다. 2023년의 루벤 외스툴룬드는 1974년 생으로 50세가 안 된다. 작년 뱅상 랭동은 1959년생이다.
‘보수와 비보수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가 나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60대 초반으로 생물학적으로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이나, 가능하면 덜 보수적으로 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왔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그럼에도 칸 같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가 한 살이라도 더 나이 어린 영화 창작자·관계자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돼서는 안 될 멋진(Cool) 변화요 모색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미래는 티에리 프레모 위원장의 상기 인터뷰에 적절히 요약돼 있다. 그는 “올해 칸영화제의 특징으로 ‘영화가 되살아났다’는 점을 꼽으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그동안 팬데믹으로 인해 극장을 안 가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인기를 모으면서 영화의 앞날이 어둡다고들 했는데 이와 같은 예측과는 달리 영화가 되돌아오고 있다. 올해 더더욱 기억할 만한 것은 스튜디오와 스트리밍 업체가 협력해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파라마운트와 애플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한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이다. 이렇게 영화사와 스트리밍 업체가 협력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 면에서 칸영화제에서 이런 영화가 선보인다는 것에 대해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블랙핑크 제니의 보잘 것 없는 출연 분량도 그렇고 선정적일 대로 선정적인 그 질적 수준으로 인해 갖은 구설수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 HBO 6부작 드라마 <디 아이돌>(샘 레빈슨 감독)의 에피소드 두 편을 영화 형식으로 비경쟁 부문에서 공개시킨 것도, 그런 방향모색의 한 결과물일 테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인기 팝 아이돌 스타가 몸담은 연예계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열정에 관해 그린 드라마 말이다. 그 선택이 과연 잘 한 것인지 여부는 개별적으로 판단할 몫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진 않으련다. 더욱이 제니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련다.
여하튼 칸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영화는 거리가 먼 TV 시리즈물을 전격적으로 품어 대대적으로 선보였다는 사실은 영화는 말할 것 없고 영화제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지대하고 지속적 함의를 띨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 영화제로 칸은 벤치마킹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올 칸은 예의 실망 내지 안타까움보다는 길이 기억에 남을 만한 적잖은 추억들을 남기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