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프리뷰] ‘소리도 없이’···’괴물신예’ 홍의정 데뷔작

홍의정 감독

가능성‧잠재력에서는 ‘<기생충> 급’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우여곡절 끝에 21일 막을 올리는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2년 전 23회 적에 <서식지>라는 제목의 단편을 선보인 바 있었다. 급작스러운 통일로 경제대공황을 겪고 있는 한반도를 무대로 전개되는, 주목할 만한 17분짜리 영화였다.

중국 상해에 사는 아들로부터 최신형 전화기를 택배로 받았으나 작동법을 몰라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초로의 노동자 찬기(변희봉 분) 등 각양각색의 네 남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웃픈’ 희비극이다.

당시 프로그램 노트는 감독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 후 2년간 영상광고 제작 프로덕션에서 프로듀서/조감독으로 여러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진행했다. 2013년 런던필름스쿨 영화과를 졸업하고 이후 런던을 중심으로 작업하며 다수의 단편영화와 광고 연출을 했다. 현재는 첫 장편을 제작 준비 중이다.”

그 ‘첫 장편’이 지난 10월 15일 개봉해 국내 박스 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다. 흥행 기세는 그리 대단치는 않아도, 단언컨대 경이로운 데뷔작!

                        소리도 없이 포스터

이런 평가는 나만의 것은 아니다. 후배 평론가 정민아 성결대 연극영화과 교수 또한 안부를 주고받던 카톡 메시지를 통해 “걸작”이라는 단평을 전해왔다.

무슨 소리냐고? 네이버 기준 관람객 평점 8점대 초반(10점 만점)에, 7명의 소위 전문가 평균도 7점에 지나지 않거늘? 일말의 호들갑일 수도, 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별 다른 주저 없이 10점 만점에 10점을 부여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걸작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진 않았었다. 출연진부터 그랬다. 열혈 팬이긴 해도 유아인은 올해 6월 선보인 전작 <살아있다>(조일형)에서는 실망스러웠다. 그동안 보아온 그가 아니었다.

배우 유아인과 유재명(오른쪽)

유재명은 <이태원 클라쓰>의 악역(?)으로 강력한 임팩트를 던져주긴 했어도, TV 드라마로 연기 수준을 가늠하긴 내키지 않았다. 지난해 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흩어진 밤>으로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을 거머쥐었다지만, 문승아야 발견을 기다리는 미래였다. 더욱이 과도한 기대야말로 영화 감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 십상이다.

매체 시사회에서 만난 <소리도 없이>는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나 봉준호의 <기생충>(2019) 못잖은 감흥‧자극‧충격 등을 두루 안겨주기 모자람 없었다. 영화는 이창동에서 출발해 봉준호와 박찬욱, 김지운을 경유해 ‘홍의정 월드’로 나아가는 역대급 문제작이었다. 혹시 영화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영화 사랑의 첫 번째 방법이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것이라고, 며칠 뒤 영화관을 찾아가 한 번 더 관람했다. <기생충>과 <버닝> 때 그랬던 것처럼.

영화의 맛은 훨씬 더 진해지고 깊어졌다. 그야말로 ‘괴물 신예’의 출현이라 일컬을 만했다.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이라는 두 남자가 있다. 언뜻 아들과 아버지뻘로 보이는 두 사내는 어느 시시껄렁한 범죄조직의 하청을 받아, 근면성실하고 전문적으로 시체 뒤처리를 하며 연명해가는 밑바닥 인생들이다.

문승아

그 둘은 어느 날 그 조직의 실장 ‘요청’으로 유괴된 11살 소녀 초희(문승아)를 억지로 떠맡게 된다. 단 하루면 된다는 실장의 약속과 달리 다음 날 아이를 돌려주려던 두 사람 앞에 실장은 시체로 나타나고, 그들은 의도치 않은 범죄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어떤가? 이 간단한 줄거리 소개만으로도 상기 명장들의 영화세계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세 주연들의 연기부터가 ‘엄지 척’(Two Thumbs Up)이다. 특히 세 주연들을 포함해 단역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클로즈업들이 큰 주목감이다. 그 중에서도 문승아의 클로즈업은 아역의 차원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아역으로만 국한하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와 <담보>(강대규)의 박소이나 <반도>(연상호)의 이레 등이 비견될 만하나, 그 복합성‧입체성에서 총체적 시선으로 판단하면 그 비교의 대상을 찾기 불가능할 정도다. 미래의 전도연 급, 이랄까. 단 향후 소모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다. 성격화는 어떤가. <살인의 추억>(2003) 등이 그랬듯, ‘캐릭터의 향연’에 값한다. 태인과 창복 등도 그렇지만, 초희 캐릭터는 압권이다.

전반적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나 미장센 등에서 <소리도 없이>는 적잖이 이창동을 연상시킨다. 유아인이 연기한 태인 캐릭터부터가 <버닝>의 종수를 빼닮았다. 유아인이 15kg나 살을 찌우면서 변신을 시도해 구현한 태인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발화를 거부하는, 소설 쓰는 지식 노동자 종수의 육체 버전이다.

하나뿐인 여동생 문주(이가은)와 살아가는 태인이 초희를 맡아 며칠 간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는 생활공간도, 영락없이 종수의 그것과 닮은꼴이다. 미지의 형제 음악감독 장혁진‧용진이 연출한 음악 효과도 마찬가지다. 양적으로는 <버닝>을 압도하나, 질적으로는 그 걸작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그렇다고 <소리도 없이>가 이창동을 흉내 내기 급급한 아류작일 거라고 오해하진 말 것. 감독은 거장 이창동에 오마주(Hommage, 경의)를 바치되, 아류를 넘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음악의 활용에서도 이창동보다 훨씬 더 적극성을 띠면서, ‘봉’과 ‘박’, ‘김’ 세 감독들에 가 닿는다.

여느 대중영화들과는 달리 그저 배경 음악(Background Music)에 머물지 않는다. 전면에 배치되는 후면에 물러나 있든, 그 대위법적 변주들이 드라마에 완벽히 스며든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 박찬욱의 <올드보이>(2004), 그리고 <버닝>과 <기생충>에 이은 또 하나의 명품 OST가 탄생한 것이다.

<소리도 없이>가 세 감독에 연결되는 지점들은 음악 외에도 수두룩하다. 우선은 이창동 영화들에 부재하는 영화적 유머들이 일품이다. 그 유머들로 극적 긴장을 해체시키며, 이야기의 완급을 조율한다. 그로써 관객들에게 쉬어가는 짬을 허용한다. 감독은 좋은 내러티브란 뭔지 아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창복과 태인이 초희를 ‘인수’ 받기 위해 중간 연결책에 전화를 걸어 길 안내를 받는데 여의치 않다. 그러자 마침 배달 온 다방 여종업원 예인(최은경)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려 하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여전히 상대방이 못 알아듣자, 또박또박 ‘흑’이 아닌 ‘흙’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그녀를 영화는 클로즈업으로 잡아 보여준다. 그로써 단역에 불가한 여배우와 캐릭터에 잊기 힘든 이미지와 소리를 각인시킨다. 그 얼마나 섬세한 배려고 연출인가.

봉준호 월드의 특징 중 하나인 ‘삑사리’ 같은 설정‧장면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한데 그 함의가 심상치 않다. 감독은 “‘인간은 선과 악이 모호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라고 작의를 밝혔는바, 그 삑사리들이 그 작의의 실현에 제 몫을 다 한다.

게다가 그런 삑사리들이 어디 봉준호만의 것이랴. 그것들은 봉준호를 선배 감독 박찬욱과 김지운에 연결시키는 결정적 지점들이다.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사건‧사연의 비틀기와 반전(Twists and Turns)은 또 어떤가. 그와 연관해 태인과 초희의 결단‧선택을 선명히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끝맺는 영화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얼얼한 ‘한방’을 안겨준다. 우리네 인간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면서…. (스포일러가 될까봐 상술하진 않겠으나,) 나는 결말부에 등장하는 초희와 태인의 표정‧몸짓들, 초희 가족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동류의 범죄성 휴먼 드라마의 거의 모든 도식을, 보란 듯 해체시킨다. 이 땅의 대중 관객들이 영화를 편히 즐기기 힘들다면, 영화의 그런 비통속성 때문일 터. 이런 유의 영화들이 으레 걷기 마련인 유괴된 아이 찾기 드라마는 아예 발생하질 않는다.

아이의 가족은 언급만 될 뿐 얼굴조차 끝내 나오질 않는다. 범죄 조직의 미화는커녕 묘사 자체도 극소화돼 있다. 살인도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영화를 통틀어 조직의 실장 등 고작 두 명이 죽어 시체로 등장할 뿐, 그들이 살해되는 장면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흥미진진한 경찰 관련 에피소드가 있긴 해도, 그 역시 내러티브의 주변부에 머무른다. 영화는 핵심 드라마가 태인-창복-초희 세 중심캐릭터들, 혹은 문주까지 포함한 네 캐릭터들을 축으로 펼쳐지는 관계의 휴먼 드라마라는 ‘존재 이유’(raison d’être)를 잊지 않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주관적일 대로 주관적인 취향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근거도 없이 막연히 좋다, 라는 느낌에 의해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좋은 영화를 넘어 수‧걸작으로 분류‧간주되려면 분석과 종합을 죄다 견뎌내야 한다. 내러티브는 말할 것 없고 시각, 청각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그래야 한다.

125년 세계 영화역사에서 그런 영화와 조우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개인적 선호 여부에 아랑곳없이 다름 아닌 <기생층>이 그런 드믄 경우다. <기생충>을 얼마든지 싫어하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영화를 가리켜 못 만들었다거나 ‘나쁜 영화’라고 평하기 곤란한 연유다. 그런데도 그렇게 진단한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투정‧매도에 불과할 확률이 높다. <소리도 없이>가 무작정 ‘기생충 급 영화’라고 주장할 마음까진 없다. 그 가능성‧잠재력에서는 그러나, 그런 평가 받을 자격 충분하다는 것이 내 총평이다.

범위를 21세기 데뷔작으로 한정하면, <소리도 없이>는 단연 최고작 감이다. 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와 나홍진의 <추격자>, 장훈의 <영화는 영화다>(2008) 등 그 동안 21세기 한국영화를 대표해온 데뷔작들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할까. 이창동과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의 영화들을 한 데 모아놓은 경지의 우리영화가 언제 존재했었던가.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런데도 기시감이나 모방의 혐의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영화보기 50년 영화 스터디 38년에 27년 차의 중견 평론가이건만, 고백컨대 잘 모르겠다. ‘태도로서 영화’, 인간을 향한 (한줌의) 예의 등이 기저에서 작용했을 법하나,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감독과의 인터뷰를 해볼 참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화들짝 놀라 홍상수를 인터뷰했던 것처럼. 이후로도 영화를 몇 차례 더 볼 예정이다. 내 진단의 적절성을 한층 더 깊고 긴 시선으로 점검하기 위해서라도…. 요즈음 나는 ‘봉-월드’에 이어 ‘홍-월드’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중이다. 물론 행복하고 감사한 허우적거림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