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진·조성현 연주 제1회 부산클래식음악제는 순항 중···
연주 수준, 레퍼토리, 객석 호응 등 기대 이상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30년 가까운 세월을 영화평론가로 살아왔지만 나는, 대학·대학원 시절 전공인 문학부터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거의 모든‘문화콘텐츠’(Cultural Contents)를 사랑해온 종합문화 애호가다.
평소 가장 좋아하는 문화예술은 춤과 음악이며 영화는 세 번째라고 말하곤 하는데, 빈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공연예술의 육체성·현장감·생동미를 영화의 기술성이나 기계성보다 더 소중히 여겨서다. 실기에서는 젬병이나 미술 또한 각별한 애정을 바쳐온 분야다. 그래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은 전시회를 찾는다.
오는 16일(화)에는 4월 17일까지 연희동 소재 황창배 미술공간에서 개최될, 황창배 20주기 기념 전시 1부‘의도를 넘어선 회화_숨은 그림 찾기’를 관람할 참이다.
지난 2일(화)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몇 개월 만에 부산을 방문해, 금정구(구청장 정미영) 금정문화회관(관장 강창일) 금빛누리홀에서 열린 제1회 부산클래식음악제(예술감독 오충근, 이하 BCMF) 개막공연을 더 이상은 불가능하리 만치 만끽했다. 말 그대로 음악의 향연이었다. 이번 BCMF는‘공존, 시간을 열다’라는 주제로 17일까지 16일간 총 7회 공연을 선보인다. 금정문화회관과 BCMF조직위원회를 비롯해 부산일보사, 부산MBC, 부산CBS가 공동주최하며, 부산상공회의소와 금정문화재단이 후원한다. 그리고 동성그룹, 신세계, 부경대학교, BNK부산은행, 패션그룹형지, 동성모터스, 송월타올·송월우산, 화인테크놀리지 등 총 10개사가 기업 메세나로 동행한다.
BCMF는“부산에서 순수예술의 새로운 부흥을 이루어내는 첫걸음으로, 예술가들에는 최상의 공간을, 관객들에게는 수준 높은 예술 감상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첫날 공연들은 단언컨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연주 수준이나 레퍼토리, 객석의 호응 등 모든 면에서 기대 이상이었다. 1부 첫 곡 모차르트 <교향곡 제25번 G단조 작품183>부터가 혹할 만했다. 전기성 음악영화의 최고봉으로 평해지는 <아마데우스>(1984, 밀로스 포만 감독)의 OST로 사용되며 더 유명해진 그 명곡 1악장은, 첫 번째 BCMF의 문을 여는 선곡으로 더할 나위 없는 선택으로 다가섰다.
여느 관현악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20명으로 구성된 실내악적 규모의 BCMF 오케스트라(리더 임재홍, 바이올린)는 예산 부족이나 수적 열세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교향악단 못잖은 풍성한 양감과 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그 만족감은 BCMF의 순항을 예시하는 축포로 손색없었다. 예술감독 오충근의 명품 지휘를 음미하지 못해 아쉽기는 했으나, 중학교 적 한때 국립교향악단 지휘자를 꿈꿨던 내게는 선장 없는 연주도 인상적이었다.
만족감은 쾰른필하모닉오케스트라 종신 수석에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 수석,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관현학과 조교수 등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조성현이 협연한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제2번 D장조 작품314>로 이어졌다. 조교수는 음악 칼럼니스트 류태형과의 사전 인터뷰에서“목가적이면서 자유로운 멜로디와 함께 많은 캐릭터가 담겨있는 곡이기 때문에 오페라라고 생각하면서 연주하면 관객 여러분도 더 잘 이해하실 것 같다”며, 오보에 협주곡이 원곡인 곡을 연주할 때‘다양한 색깔’에 가장 중점을 두겠다고 역설했는데, 그 다양한 색감은 그 특유의 다채로운 발·몸동작 등과 더불어 객석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플루트를 잘 부는 사나이’(<더 프리뷰> 이종호 기자) 등의 명성은 괜히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만족의 절정은 2부를 황홀하게 수놓은 한수진의 몫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 최연소 참가해 한국인 최초로 2위에 입상했던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30대 중반인 그녀는 대가(Virtuoso)적 기량·면모를 유감없이 뽐내며 음악 콘서트는 물론 클래식의 진수를 청중에게 듬뿍 안겨줬다. 마치 BCMF의 성공을 공개적으로 선언이라도 하는 양…. 코로나 방역으로 인한 거리두기 탓에 880석의 금빛누리홀이나 394석의 은빛샘홀 공히 50%만 좌석을 팔 수밖에 없었으나, 그 성공은 ‘매진’으로 드러났다.
5일(금)과 6일의 은빛샘홀에서의 공연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담당 주무관의 전언에 의하면, 표를 구매하지 못해 대기 중인 고객들의 수가 수십 명에 달한다고. 상상이 가는가. 이 울적한 코로나 시기에 매진이라니? 당장 영화관은 2백∼3백석에 10명도 채 되지 않는 ‘참사’가 일상이 되지 않았는가.
연일 국내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스티븐 연, 한예리, 윤여정,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주·조연, 리 아이작 정 감독의 화제작 <미나리>를 지난 8일(월) 다시 볼 때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한수진의 선곡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명 작곡가이자 반도네온연주자인 ‘탱고의 전설’아스토르 피아졸라(1921년 3월 11일∼ 1992년 7월)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였다. 한수진의 전언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초연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을 터. 류태형과의 인터뷰에서 그 도전의 이유가 발견된다. 부산 태생으로 BCMF를 향한 각별한 애정이랄까. “개인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 소중하고 제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재료’들이 있는 정든 도시입니다. 부산클래식음악제가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부산의 향기를 담아 많은 분들께 기쁨과 위로를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친 김에 한수진의 안내를 좀더 가져와보자. 피아졸라는 남미에서 태어났으나 뉴욕에서 유년을 보내며 재즈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클래식도 많이 들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벨라 버르토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고, 유럽 유학까지 하면서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섭취하면 성장했다.
“유럽과 남미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졸라의 <사계>는 버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하고 원초적인 리듬감, 그 사이사이로 때로는 열정적이고 때로는 여리고 낭만적으로 상반된 멜로디의 블랙 & 레드 색채가 보이는 듯”하다. 한수진은 자신의 초연곡의 감상 포인트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중간중간 비발디 <사계>의 모티브들이 오마주처럼 살짝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완전히 피아졸라만의 세계로 흡수되어 원래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쉽지않”지만 “그 모티브들을 찾고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며 감탄하는 것”이라고.
한수진의 상기 발언들이 100% 구현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연주는 아직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른 연주자들을 통해 감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곡을 세계적으로 알린 주인공이었다는 명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날 한수진이 빚어낸 그 강렬하고 깊은 협연의 맛에 필적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총평이다).
그만큼 한수진의 연주는 압권이었다. 공연전문가인 김동언 경희대 교수의 다음과 같은 극찬은 과장이 아니다. “연주자의 자세,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 정경화를 넘어서는 에너지 그러나 정제된, 장엄한 서사를 풀어 드라마로 만드는 장쾌한 스타일, 미분음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할 줄 아는 섬세한 감성과 표현력, 오케스트라와 주고받는 완벽한 호흡과 앙상블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성숙미까지 물씬 풍겨주었다.”
나는 전적으로 위 견해에 동의한다. 영화건 공연이건 세상의 모든 ‘인간 예술’(Human Art)의 완성도는 임팩트의 강약과 리듬의 완급에 의해 결정·좌우되는바 한수진은 최상의 완성도를 구현·구사했다. 지난해 6월 10일(수)리노베이션 이전의 같은 공연장에서 있었던 ‘금정문화회관 개관 20돌 & 베토벤 탄생 250주년 Dear 베토벤! 운명’에서 선보인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61> 연주 때 이미 입증했던 걸출한 솜씨였다.
그때의 첫 조우 이후 한수진은 내게 대한민국 최강 바이올리니스트로 머물러 있다. 고백컨대 나는 그녀의 연주를 맛보기 위해 서울 예술의전당을 찾기도 했고, 유튜브를 통해 수시로 찾아 감상하곤 하는 ‘열혈 팬’이다.
한수진의 앙코르(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나 예고되지 않았던 노지연의 오보에 깜짝 연주(피아졸라의 <망각 Oblivion>) 등 덤으로 주어진 선물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청중의 진심 가득한 열띤 환호와 박수갈채 또한,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명연주 못잖게 내게 강력한 인상을 각인시켰다.
그 반응에는 부산 시민들의 자부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 일궈낸 데다 2021년 대한민국음악제라는 귀중한 성취에서 연유하는 뿌듯한 자긍심이랄까. 그와 관련 외지인 강창일 관장의 감회는 주목에 값한다.
“예산은 불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뛰어난 인력이 있고, 좋은 공간이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가와 관객에 대한 ‘정성’이 있습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는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2009년부터 2016년까지는 프로그래머, 영화연구소 소장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몸담은 적 있는 외지인인 내게 그 자부심·자긍심은 일찍이 부산영화제에서도 맛보기 힘들었던 감동적 기운이었다. 벌써부터 제2회 BCMF가 기다려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래도 상관없다. 그 전에 17일에는 열릴 폐막공연을 즐기러 다시금 부산을 찾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