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감독 정이삭의 ‘미나리’의 역사적 성취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1980년대, 희망과 구원을 찾아 이민 간 미국 캘리포니아를 떠나 시골 마을 아칸소로 막 이주한 한국 가족이 있다. 병아리 감별사로 능숙하게 10년을 일해 왔으나 그에 만족할 수 없어 아이들에게 뭔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입증하고픈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 분)과 엄마 모니카(한예리) 가족이다. 제이콥은 대형 이동식 트레일러 주택을 거처 삼아 열정적으로 농장을 가꾸기 시작한다. 모니카는 남편의 선택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병아리 감별 일에 다시 뛰어든다.
문제는 아직은 어린 두 아이를 돌보는 일,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가 네 식구에 합류한다. 고춧가루, 멸치, 한약 그리고 미나리씨를 가방 가득 담아, 한국에서 아이들 외할머니가 미국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 의젓한 큰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장난꾸러기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S. 김)은 여느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가 영 못마땅하다. 그들 다섯 식구는 과연 어떤 삶을 펼쳐나갈까···.
재미교포 2세 리 아이작 정(한국이름 정이삭) 감독의 네번째 장편극영화 <미나리>가 연일 화제다. 2020년 제36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 수상을 기점으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및 미국배우조합상(SAG) 후보에 오르는 등 2월 25일 현재 세계적으로 74관왕에 157개 부문 후보에 지명됐고, 그 중 윤여정이 26개의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2월 18일 매체 시사에서 영화를 관람했으나, 본격 리뷰는 3월 3일 개봉 이후 하련다.
<미나리>는 엄연히 ‘미국영화’이건만 한국어가 50% 이상 사용됐다는, 명분상의 내부 규정으로 인해 2월 28일(현지시간) 개최될 78회 골든글로브상에서 작품상 후보에서는 아예 배제되고 끝내 외국어영화 부문에서만 노미네이트 됐다.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가 수여하는 그 시상식에서 <미나리>는 <기생충>에 연이어 수상의 영예를 차지할까.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객관적 지표로는 제일 유력하다.
<셀레브레이션>으로 1998년 칸 심사위원상, <더 헌트>로 2012년 칸 남우주연상(마즈 미켈슨)을 안았던 명장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덴마크)를 비롯해 소피아 로렌이란 이름이 단연 눈길을 끄는 <자기 앞의 생>(이탈리아, 에도아르도 폰티)이나, 과테말라 출신 감독 하이로 부스타만테의 <우는 여인>(과테말라·프랑스), 이탈리아 태생 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프랑스·룩셈베르크·벨기에 합작품 <우리 둘>의 기세들도 결코 만만치는 않겠지만 말이다.
3월 15일 최종 후보가, 4월 25일 상의 향배가 결정될 93회 아카데미상을 향한 관심 또한 지대할 수밖에 없다. 골든글로브의 고루한 결정을 반전시킬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은 하고 있으나, 우선 “골든글로브나 아카데미의 결과에 관계없이 <미나리>가 거두고 있는 성취는 이미 충분히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126년 세계영화역사에서, 70대 중반의 아시아 여성 배우가 그 ‘잘난’ 서구의 평론가들과 저널리스트들로부터 이렇듯 광범위하게 공인받은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결단코, 없다. 나이를 수십 년 하향해도 다를 게 없다.
아시아 출신 최고 인기 여우들이라 할 수 있는 공리, 장만옥, 장쯔이, 탕웨이 등이 누려온 각광도 이번 윤여정의 그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실은 남자배우까지 포함시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윤여정에는 못 미쳐도 스티븐 연, 한예리, 앨런 김 등 다른 연기자들을 향한 갈채도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리 아이작 정이 일구고 있는 쾌거는 어떤가. 동포 출신 감독 가운데 그처럼 크고 깊은 인정을 끌어낸 감독이 있었던가? 역시 없었다. 그는 2012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됐던 <아비가일>과 2010년 미국 트라이베카영화제 등에서 선보였던 <럭키 라이프>(2010)로는 소소한 성과를 올리는 데 그쳤다.
한국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재해석해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휴먼 드라마와, 미국의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인 제럴드 스턴의 시에 영감을 받아 빚어냈다는 가족 드라마. 하지만 데뷔작 <문유랑가보>로 그는 2007년 제60회 칸영화제 공식 섹션 중 하나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월드 프리미어 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10번째로 칸을 찾았던 나는 그 영화가 일으켰던 센세이션을 생생히 기억한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한국계 미국 감독이 부모 원수를 갚기 위해 집을 나선 두 10대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르완다 내전 문제를 극화했으니, 크고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건 당연했다.
<미나리>에서처럼 그때도 그는, 그럴 법한데도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차분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두 소년을 따라갔다. 한 소년이 오래 전 떠난 고향집으로 돌아가자 홀로 길을 가는 주인공 문유랑가보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한다.
르완다 청년 영화인들에게 영화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 문제작에 대해 서구의 한 평자는 이렇게 말했다. “르완다 내전을 다룬 가공스럽게 힘이 넘치는 영화들을 더러 본 적은 있으나, <문유랑가보>처럼 르완다인들이 자신들 경험에 대해 직접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들 언어로 연기하는 등 르완다인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없었다.” 故 로저 에버트는 영화를 ‘걸작’이라고 평했다.
십수 년 전 뿌려졌던 씨앗의 결실이 결국 <미나리>로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허구를 가미한 자전적 가족드라마로···. <기생충>과의 비교를 떠나, <소리도 없이>의 홍의정 감독에 이어 그에게서 ‘포스트-봉준호’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은 그래서다. 잊지 마시라. 그의 나이 40대 초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미나리>의 또 다른 의의를 또 다른 지점에서 찾는다. 영화는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제를 전격적으로 소환·환기·각인시키는데 전환점(Turning Point)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배창호와 이장호, 김호선, 조정래 등이 각각 <깊고 푸른 밤>(1985)와 <명자 아끼꼬 쏘냐>(1992), <애니깽>(Henequen; 1996), <귀향>(2016) 등을 통해 일찍이 다룬 바 있다.
<미나리>는 문화예술과 오락이 얼마나 밀접하게 (현실)정치와 연관돼 있는가를, 영화가 얼마나 인상적으로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으로 극화시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가를 새삼 증거한다. <기생충>이 가족 희비극을 통해 이 세상의 비정한 신자유주의를 향해 통렬한 화살을 날렸듯. 그럼으로써 <미나리>는, 비평가로서 필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온 영화의 공론장(Public Sphere)적 기능을 인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성취들인가!
그렇다고 <미나리>에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추후 리뷰편에서 상술하련다. 다만 한 가지, 이 코칭은 하고 싶다. <미나리>를 좀더 합당하고 풍성하게 즐기고 싶다면 최대한 <기생충>과의 영화 미학적, 예술적 비교는 하지 말고, 비판적 거리감을 뗀 채 감상하고 음미하라고. 영화만이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지나친 기대는 바람직하지 않으니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