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여름영화 대해부②] ‘밀수’…김혜수가 한국영화 또 살린다
2023 여름 대목 첫 번째 한국영화인 <밀수>는 ‘장르 영화 키드’로 영화계에 뛰어든 류승완 감독의 장기가 효과적으로 구현된, 복고풍의 웰-메이드 오락 영화다. 그러면서도 류승완 영화 특유의 한국사회를 향한 일말의 풍자?비판 역시 놓치지 않는 미덕도 겸비한 수작이다.
문제적인 너무나도 문제적인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부터 최근작 <모가디슈>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사회성을 겸비한 오락성과 오락성이 내포된 사회성을 동시에 구현해왔는바, <밀수> 또한 예외가 아닌 것이다. 그 점에서 류승완은 ‘봉준호의 직계 후배’로 일컬어질 만하다.
이미 언급했듯, <밀수>의 으뜸 재미는 무엇보다 출연진의 명품 연기와 그 연기자들이 구축한 성격화(Characterization)에서 만끽할 수 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김혜수와 염정아 투톱은, 핵심 캐릭터들인 해녀 친구 조춘자와 엄진숙을 실감 가득 구현한다. 그녀들의 열연을 ‘생애 최강’이라고 평할 순 없을지언정,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 영화계의 자랑스러운 두 여걸의 ‘케미’와 개별 연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 지나치게 후한 평가일까).
그만큼 인상적인 것, 그래서일까? 그 두 절친의 우정과 결별, 재회, 의기투합, 승리의 플롯을 따라가는 극적 맛과 멋이 무척이나 강렬하다. 그들의 드라마를 지켜보는 맛만으로도 영화는 들인 비용과 시간을 보상해주기 충분할 성싶다. 기대 이상의 합을 뽐내는 그들은, 영화의 재미와 의미를 성공적으로 감당한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8881 참고)
일찍이 류승완 감독은 초기작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통해 기념비적 여성 투 톱 영화를 선보였다. 수진 역의 전도연과 경선 역 이혜영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영화는 <델마와 루이스>의 한국판’으로 평하기 모자람 없었다. 하지만 그 문제적 수작에서는 다른 캐릭터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정재영이 독불이, 류승범이 채민수, 베테랑 신구가 K.G.B 역으로 등장하나, 지금 이 순간 그들 중 그 누구도 내 기억의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않고 있다. <밀수>는 그러나 다르다.
전작 <모가디슈>에서 류승완과 멋진 호흡을 과시했던 조인성은, 전국 밀수판을 좌지우지하는 악당 캐릭터 권상사 역을 멋들어지게(Cool) 소화해낸다. 이름값에 비해 비록 양적 비중에서는 크지 않아도, 제 몫을 톡톡히 수행해낸 것이다. 언뜻 지독한 빌런으로 비치나, 춘자를 향해 문득문득 드러내는 인간적 정감이 안겨주는 감흥은 (내게) 결코 작지 않다. 양적 부족을 질적 충만으로 상쇄시킨다고 할까.
나이 어린 다방 마담 고옥분 역의 고민시도 마찬가지다. 김다미를 발견시킨 <마녀>(2018, 박훈정 감독)의 도명희로 대중적 눈길을 끌고 2020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10부작 드라마 <스위트홈>을 통해 국내외에 널리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2021년 첫 정통 멜로 주연작인 KBS2 12부작 드라마 <오월의 청춘>으로 호평을 받았다, 는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의 (여)배우.
필자가 고민시에 매혹된 결정적 계기는 상기 텍스트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내 눈썰미와 기억력이 그만큼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으나, <마녀>에서의 고민시를 나는 전혀 모른다. <스위트홈>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고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어도, 끝내 시청하진 않았다. <오월의 청춘>은 아예 들어본 적조차 없다. 그 계기는 전북 대표도시 중 하나인 군산에 대한 수준급 ‘시적 다큐멘터리’ <군산전기>(2023)를 통해, 한때 꽤 좋아했던 문승욱 감독(<이방인, 1998>, <나비, 2001>, <로망스, 2006>)을 다시 만나며 성의 반 호기심 반으로 작심하고 스크리너를 받아 관람한 그의 직전 작 <세트플레이>(2020)였다.
더 이상 추락할 곳조차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내는 고등학생 주인공 성철(이재균 분)을 축으로 펼쳐지는 우리 시대 청춘의 가슴 아린 자화상. 그 지독한 성장담에서 고민시는 성철의 ‘여친’ 유선 역으로 영화를 말 그대로 ‘훔친다’. 300명도 채 찾지 않은 그 초라한(?) 영화로 그녀는, 영화 보기 구력 오십 수 년에 영화 스터디 41년, 비평 30년의 시네필을 전격 사로잡기에 이른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줄곧, 그 어떤 텍스트이든 감각적이건 정서적이건 지적이건 그 어느 층위에서건 관객?시청자를 확 끌어당기는 모든 요소를 가리키는 어트랙션이란 용어?개념으로 영화를 즐기고, 나아가 삶을 살아온 내게 고민시란 배우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밀수>의 고민시?고옥분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밀수>는 말할 것 없고 <세트플레이>에서 고민시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치명적’이란 극찬적 수사는 그래서 동원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만큼은 아니어도 박정민과 김종수가 선사하는 임팩트도 강렬하다. 박정민은 옥분과 ‘썸’을 타며 해녀들을 보필하다 서서히 배신의 아이콘으로 변질돼가는 막내 장도리 역을, 김종수는 언뜻 의로운 공무원인 양 행세하나 권상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결국은 최강 빌런으로 나아가는 세관 계장 이장춘을 생동감 넘치게 연기한다. 내친김에 한 월간지에 연재 중인 배우 이야기 박정민 편의 일부를 옮겨보면 어떨까. “…장도리는 1970년대라는 시대성을 상징·대변하는 캐릭터인 셈이다. 류승완 감독이 그런 캐릭터로 박정민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지 않나 싶다. 나이도 그렇거니와 연기 스펙트럼이란 측면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이미지를 전격 차용한 그 배역에 가장 어울릴 법한 배우는 박정민 외에 거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류승완 감독과의 작업이 꿈이었다는 박정민도 대본을 읽기도 전에 출연 제의에 응했다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장도리 캐릭터는 ‘밀수’라는 가볍지 않은 시대적 사건을 전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게, 달리 말해 경쾌하게 해석한 감독의 작의(作意)에 완벽히 부응한다.
(http://wom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209)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운 활약상은 60줄을 바라보는 김종수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이정재 감독의 <헌트>에서 주연을 맡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사실상은 조연이다. 1985년 연극 <에쿠우스>의 주인공 알랭 역으로 연기에 투신한 그는 40년 가까운 짧지 않은 세월을 줄곧 연기와 함께 살아왔다. 본격 영화 데뷔작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이었다.
그 이후 수십 편의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연기자로 여기저기 불려다녔으나, ‘만년 조연’으로서 이미지가 굳혔다. 장준환 감독의 <1987>(2018)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역으로 영화를 ‘훔친’ 그는 <비공식작전>에서는 외무부 장관으로 분해 인상적 호연을 펼친다. 그는 지난해에는 <헌트> 외에도 최국희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변성현) 등에, 올해에는 이해영 감독의 <유령>과 이병헌 감독의 <드림> 등에 조연이나 특별 출연 등으로 바삐 지내왔다.
“진중함과 코믹 연기, 선한 역부터 악한 역할, 가진 게 너무도 많은 역할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소시민까지. 연기 폭이 넓은 것이야말로 그의 두드러진 장점”(https://blog.naver.com/cine_play/223168663277)인 덕분이다.
그는 연기하는 게 그토록 즐거웠단다. 대한민국 최초의 조연배우 인터뷰집인 『신스틸러에게 묻다 – 25인 배우가 전하는 다른 삶 다른 철학』(김시균, 북스토리, 2019)에서, 그렇게 답한다. 그때까지의 연기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달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말이다. 그거면 됐단다,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어릴 때부터 영화의 매력에 빠져 판타지를 품어왔다는 그는, 이렇게도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영화가 “도피처여서는 안 된다”는 것. “배우는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현실에 발붙이고 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 시각이 생기고 내가 생긴다”는 것이다.
배우라면 의당 명심해야 할 연기 신념이요 철학이다. 마침내 조연을 넘어 ‘서브-주연’으로 비상한 <밀수>야 말로 연기자 김종수의 총화로 부족함 없다. <비공식작전> 포함 그간의 그 어떤 역, 연기도 <밀수>에 필적할 수는 없기에 내리는 진단이다.
그렇다고 <밀수>가 연기와 성격화만으로 승부를 거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거침없는 추동력으로 밀어붙이는 내러티브의 힘이나, 1970년대라는 시대성을 그럴 듯하게 증거하는 미장센, 그 시대를 전격 환기?호출하는 사운드 등도 간과해서는 안 될 미덕들이다. 특히 ‘옛것을 고쳐 자기만의 새것으로 변형?창조해온 대한민국의 대표적 싱어송라이터’라는 장기하가 생애 최초로 맡은 음악 연출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당대 톱 가수 최헌의 ‘앵두’를 비롯해 한대수의 ‘하루아침’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펄 시스터즈의 ‘님아’, 나미와 머슴들의 ‘행복’과 ‘미운정 고운정’, 송대관의 ‘해뜰날’, 김정미의 ‘바람’, 김추자의 ‘무인도’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이은하의 ‘밤차’,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 당대를 숱한 명곡들이 영화의 쾌감을 한층 더 제고시켜준다. 일찍이 <밀수>가 일종의 ‘영화 콘서트’로서도 손색없다, 고 진단한 것은 그래서였다.
물론 비판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못마땅한 이들에게는 나열식의 음악 과잉이라든지, 다수의 중심 캐릭터들로 인해 심심치 않게 중단되곤 하는 극적 몰입이라든지, 해녀이건만 바닷속을 잠수하고 나온 후에도 말짱한 화장기가 남아 있는 여배우들의 얼굴이라든지, 정색하고 지적할 결점들이 수두룩할 수 있다. 내게는 그런 흠들이 영화를 즐기는 데, 그다지 문제될 게 없지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