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3칸 통신⑧] 결산(상)···프랑스 신승·일본 완승·핀란드·튀르키예 선방 그리고···.

제7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추락의 해부’를 연출한 저스틴 트리에 감독이 27일(현지시간) 시상대에서 트로피를 치켜들고 있다. 폐막식 여우주연상 시상자로 나선 한국 배우 송강호와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축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주 제작국 및 감독의 출신 국가 관점에서 경쟁작 수상 결과를 바라보면, 76회 올 칸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신승, 일본의 완승, 핀란드와 튀르키예의 선방, 미국의 체면 유지, 이탈리아의 수모 정도로 평할 수 있지 않을까?

황금카메라상과 감독상을 프랑스가 가져갔는데 ‘신승’이라니 무슨 (헛)소리냐, 는 등의 반문이 당장 터져나올 수 있겠다. 그렇긴 하다. 고작 7개밖에 안 되는 본상 중 프랑스가 1등상과 3등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으니. 하지만 총 7편에서 2편이 수상한 데다 트란안훙이 베트남 출신이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완승’이라 진단하기 주저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완승이라는 평가는 일본영화에 주어져야 한다. <완벽한 날들>이 일본과 독일의 합작품이라 1편반이긴 하나, 일본이 제작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초청된 두 편이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안았으니 말이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이 감독상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가 남우주연상(송강호)을 거머쥐었던 지난해 한국영화가 그랬듯….

심사위원상의 핀란드(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낙엽들>)와 여우주연상의 튀르키예(메르베 디즈다르, 누리 빌게 제일란의 <건초에 대하여>)의 ‘선방’이야 그렇다손 쳐도, 미국영화의 ‘체면 유지’와 이탈리아영화의 ‘수모’는 또 무슨 말일까? <흥미의 영역>은 심사위원대상이라는 큰 상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한데 영국과 폴란드가 합작에 참여한 그 미국영화의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는 영국 태생이다. <검은 파리들>의 장-스테판 소베르 감독도 프랑스 태생이다.

이 영화는 《스크린》 12인 평단으로부터 평균 평점 최저인 1.3점을 얻으며, 일찌감치 “이런 영화가 어떻게 경쟁에 초대된 거지?” 등의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2인에게는 0점을 받는 ‘망신’을 당하기까지 했다. 칸 경쟁 부문 공식 초청작이거늘. 따라서 그 조롱은 칸 선정위원에로도 향한다. 연기의 달인 숀펜과 마이클 피트에 살아 있는 복싱 신화 마이크 타이슨까지 가세했기에, 미국의 스타들이 절실히 필요했을 칸이 무리수를 행한 것이겠지만 해도 너무 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하긴 그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제 아무리 대단한 칸영화제라도, ‘대중적 흥행’ 같은 주요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고 영화제를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3편이나 초청받았건만 다들 빈손으로 돌아간 이탈리아영화에 시선을 던지면, ‘수모’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들의 방>으로 2001년 황금종려상 등을 이미 쥔 바 있는 명장 난니 모레티의 <미래의 태양>을 보면서는, 그 나이브함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영화감독 조반니는 프로듀서인 아내와 관계가 썩 좋지 않고, 존 치버의 소설 『헤엄치는 사람』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도 난항을 겪으며 영화를 제작 중이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과 마찬가지로 영화(만들기)에 대한 영화, 즉 일종의 ‘메타 영화’라는 요인도 그렇거니와 코로나-19를 겪으며 세계 콘텐츠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넷플릭스를 향한 통렬한 ‘비판’ 내지 ‘푸념’이 재밌긴 하다.

게다가 대한민국이 궁지에 몰린 그 영화를 구제하(려)는 투자국으로 설정된 스토리도 그렇고, 그간 심심치 않게 해온 터라 감독이 직접 소화한 연기 등도 꽤 흥미롭긴 하다. 그 속내는 그러나 <거미집>과는 그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마디로 1차원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스크린》으로부터 <검은 파리들>과 마찬가지로 1.3점을 받았다. 역시 2명에게는 0점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이 영국 최고의 비평가 피터 브래드쇼다. <헤어질 결심>에 4점 만점을 줬던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가디언》 소속으로 21편 중 딱 한 편에 0점을 부여했는데, 그것이 <미래의 태양>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두 이탈리아에 대한 현지 평가는 꽤 양호했다.  2021년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였던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의 <납치>와, 알리체(여태까진 ‘알리스’로 표기했지만 정정한다) 로르바허의 <키메라>에 대한 《스크린》 평점은 2.5점과 2.9점이었다.

특히 1858년에 교황(피우스 IX)에 의해 볼로냐의 한 유태인 소년이 ‘납치’됐던 실화를 긴장감·속도감 가득한 연출 호흡으로 유려하게 극화한 <납치>의 무관(無冠)은, 올 칸 경쟁 부문 심사위원들의 ‘직무유기’(?)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겠다 싶다. 개인적으로는 그 영화의 의미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서진 않았어도, 영화의 ‘존재이유’나 만듦새가 워낙 수준급이라 수상권에는 들었어야 한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영화는 결국 올 칸으로부터 이런저런 수모들을 당한 꼴이 된 셈이다.

평생 단 한번밖에 받지 못하기에 그 함의에서는 황금종려상을 능가하는 황금카메라상으로 시야를 확장시키면, 올 칸의 진짜 완승은 베트남의 몫이라 진단해야 한다. 팜티엔안의 <노란 고치껍질 안에서>의 영화적 수준에 대해서는 7탄에서 어느 정도 피력했으니, 더 이상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경쟁 및 주목할만한시선 같은 칸 공식 섹션작이나 프랑스 비평가들이 선택하는 비평가주간 초청작이 아니고, 프랑스 감독협회 소속 영화인들이 선정하는 병행 섹션 감독주간의 영화가 그 어렵다는 최우수 신인감독상을 거머쥐었다는 바로 그 사실만은 새삼 환기시키지 않을 순 없을 성 싶다. 그것은 곧 어떤 영화에 대한 영화제나 영화상에서의 평가는 심사위원 구성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영화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나 어떤 콘텐츠에 대한 최종 평가는 그만큼 상대적·가변적인 것이다. 가령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과 마렌 에데 감독의 <토니 에드만>(2016)이 《스크린》 평점 역대 1, 2위인 3.8점과 3.7점을 받고도 빈손에 그친 것은, 심사위원단과 소위 ‘궁합’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지, 영화가 별로거나 후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경쟁부문 심사위원단 기자회견 장면. <전찬일 평론가 촬영>

필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영화제·영화상의 정치학을 역설해온 것은 그래서다. 영화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나 어떤 콘텐츠에 대한 최종 평가는 그만큼 상대적·가변적인 것이다. 가령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과 마렌 에데 감독의 <토니 에드만>(2016)이 《스크린》 평점 역대 1, 2위인 3.8점과 3.7점을 받고도 빈손에 그친 것은, 심사위원단과 소위 ‘궁합’이 맞지 않아 그런 것이지, 영화가 별로거나 후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쩐아인훙의 감독상과 팜티엔안의 황금카메라상 수상은, 최근 비상에 비상을 거듭하고는 있어도 여전히 갈 길이 먼 베트남영화의 어떤 전환점(Turning Point)이 될 게 확실하다. 물론 쩐아인훙을 향한 베트남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익히 알고 있다. 귀속 본능이 유난히 강한 베트남인들로서는 일찌감치 프랑스인이 돼버린 그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을 법도 하다.

실제로 훙 감독이 칸과 베니스에서 황금카메라상(<그린파파야 향기, 1993>)과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씨클로, 1995>)을 안은 것은 30년과 28년 전이다. 비록 프랑스 자본이 투자됐어도 둘 다 베트남 이야기다. 2000년 칸 주목할만한시선에서 선보인 <여름의 수직선에서>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 그였기에 1990년대 당시 그는 아시아영화의 대표적 주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꼴이랄까.

이병헌, 조쉬 하트넷, 기무라 타쿠야 세 스타가 <나는 비와 함께 간다>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으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정작 영화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꼴’이었다. 나는 그때 맛본 실망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와 <여름의 수직선에서> 사이에 무려 9년이란 긴 연출공백이 있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을 리메이크한 <상실의 시대>(2010)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시아, 아니 세계를 뒤흔든 원작 소설의 그 강렬하고 깊은 맛깔을 그렇게 무력화시키는 감독의 ‘솜씨’에 실망을 넘어 화가 치밀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이터니티>(2016)를 발표한다. 오두리 토투에(<아멜리에, 2001>)와 멜라니 로랑(<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 베레니스 베조(<아티스트, 2011>) 등 스타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동원했지만,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참패를 면치 못했다. 2017년 5월 국내 개봉된 영화는, 놀라지 마시라, 1만은커녕 5천선도 넘지 못하는 대참상에 직면했다.

이렇듯 쩐아인훙은 잊힌, 과거의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칸에서 감독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스크린》에서도 비교적 높은 평점인 2.8점을 득했다. 《타임》의 저명 평론가 스테파니 자카렉 등 3명이 4점 만점을 선사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세계 최고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안고, 평론가들에게도 이런 호평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멋진(Cool) 귀환이 가능할 수 있을까, 싶다.

<도당 부탕의 열정>은 프랑스 자본으로만 빚어진, 단독 프랑스영화다. 베트남 자본은 단 한 푼도 들어가질 않았다. 전적으로 베트남 드라마인 <노란 고치껍질 안에서>와 달리, 베트남 배우도 없다. 설사 있다손 쳐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기저에는 감독의 베트남(적), 나아가 아시아적 감성이 관류한다. 음식을 통한 인간의 조화·헌신성 같은 것이랄까. 만약 프랑스 감독이 그 영화를 연출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게 뻔하다. 영화를 보며, 기대 이상의 감흥을 맛본 것은 그래서였다.

베트남 영화산업은 날로 확대 중이긴 해도,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칸영화제 기간 중 같이 열리는 칸필름마켓에서 매해 발행하는 「세계 영화시장 동향」에 산업 통계조차 소개되지 않는 실정이다. 쩐아인훙 외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베트남 감독이 있는가? ‘베트남 영화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손꼽히는’ <강 위의 여자>(1987)나 <10월이 오면>(1984) 등으로 유명한 ‘베트남의 국민 감독’ 당낫민이 있으나, 철저히 ‘국내용 명장’일 따름이다. 베트남을 벗어나면 그를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1997년 처음 참석한 이래 올해 22번째 칸영화제를 취재한 전찬일 평론가가 28일 오후 칸영화제 공식 부티크에서 베트남 출신 팜티엔안 감독과 포즈를 취했다. 팜티엔안은 올 가을 부산영화제에 참석할 예정이다. 6월 중순 베트남을 방문하는 전찬일 평론가는 “베트남 관련 영화 특강을 추진하고 있다”며 베트남영화를 세계무대에 더 정확히, 더 많이 알리는 역할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올 칸을 통해 쩐아인훙에 이어 팜티엔안이 세계 영화역사에 당당히 진입했다. 그의 전작 <정신 차려>가 2019년 칸 감독주간에 선보이며 상을 받고 부산영화제등을 통해 그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긴 했어도, 그것은 단편이었다. ‘길모퉁이 노점에 자리 잡은 세 명의 젊은이 사이에 신비로운 대화가 오가고’, ‘그들 눈앞에 오토바이 교통사고가 벌어진다.’ 영화는 그 밤 그 ‘현실의 다채로운 프레임을 스케치’(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했다.

아시아영화가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쥔 것은 정확히 10년 전, 싱가포르 안소니 첸의 <일로 일로> 이후 10년 만이다. 첸 감독은 <더 브레이킹 아이스>를 올 칸 주목할만한시선에서 선보였는데, 북한 사람들이 등장해 한국어가 심심치 않게 쓰이는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렇듯 올 칸에서는 여러 모로 아시아영화의 크고 작은 존재감이 빛났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술해야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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