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3칸 통신⑨] 결산(중)…”아시아영화 존재감 빛났다”

“비록 경쟁작은 없었어도 올 칸에서 선보인 7편의 한국영화의 선전은 큰 눈길을 끌기 모자람 없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황혜인 감독의 <홀>은 학생 단편 경쟁 섹션인 라 시네프에서 윤대원 감독의 <매미>에 이어 2년 만에 2등상을 안았다. “(본문 가운데) 사진은 2023 칸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장편 영화 <괴물> 감독 고레에다 

첫 번째 결산을 겸한 지난 여덟 번째 칸 통신 말미에, “올 칸에서는 여러 모로 아시아영화의 크고 작은 존재감이 빛났다”고 진단했다. 물론 과장인 감이 없지 않다. 경쟁 부문에 한정하면 주 제작국 기준으로 그 편수는 총 21편 중 일본영화 2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52년 이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튀르키예를, 지리적으로는 97%가 아나톨리아 반도 즉 소아시아에 속하는바 ‘습관적으로’ 아시아영화에 포함시키더라도 3편이다. 다른 지면에 ‘프랑스와 중국의 합작품’이라고 소개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칸영화제 홈페이지의 공식 안내에 따르면 중국 태생 왕빙의 다큐멘터리 <청춘(봄)>도 프랑스-룩셈부르크-네덜란드 합작품이다.

그러나 아시아영화로서 <청춘>의 정체성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비록 자본이야 서구 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할지언정, 감독이 중국 출신의 세계적 명장 아닌가. 영화는 상하이 근처의 즈리(Zhílì; 직례, 중국어 간체자 直隶, 정체자 直隸)를 주 무대로 2만 개 가까운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이르는 수많은 중국 노동자들의 반복되는 일상들과 가끔씩 벌어지는 일탈들을 별다른 가공이나 수식 없이 추적‧기록한 다큐 아닌가. 2014년부터 5년에 걸쳐 찍은 2,600시간 분량에서 3시간 반가량으로 최종 완성시켰다지 않은가.

‘특별 상영’에서 선보인 왕빙의 ‘경이로운’ 60분짜리 중편 <맨 인 블랙>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미국-영국 합작으로 빚어졌으나, 중국 출신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영향력이 큰 80대 후반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 왕시린(王西麟)에 관한 다큐 말이다. 그는 중국의 그 악명 높은 ‘문화혁명’(1966~76년) 기간 내내 구타와 고문, 투옥을 치러내는 등 극심한 탄압을 감내해야했다. 상기 지면에도 밝혔듯, “그가 읊조리거나 포효하는 독백이나 일성들이야 그렇다손 쳐도, <청춘>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예술적 스타일은 ‘발견’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술가의 벌거벗은 몸과 (목)소리들, 그가 작곡한 교향곡 등 음악들, 더 이상 유려하기 힘들 카메라워크 등의 결합이 일생일대의 예술체험으로 손색없다. 올 칸은 이 다큐가 남긴 인상만으로도 잊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이쯤 되면 왕빙의 무게감만으로도 아시아영화의 존재감은 2023 칸에서 빛났다고 할 수 있을 성싶다. 더욱이 위에서 거론한 세 경쟁작들이 다 수상을 했다. 감독상 수상자인 쩐아인훙도 베트남 출신이다. 또 베트남의 신예 감독이 섹션 불문하고 최우수 장편 데뷔작에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쥐었다. 베트남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이렇게 찬란하게 빛난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다!

1978년에 첫 도입 이후 46회에 이르는 동안, 아시아영화가 황금카메라상을 안은 것은 총 9번(https://en.wikipedia.org/wiki/Cam%C3%A9ra_d%27Or 참고)이다. 쩐아인훙의 <그린파파야 향기>는 공식적으로 프랑스영화로 기록돼 있다. 인도 2편(1988/ 1999), 2000년 공동 수상을 포함해 이란 3편(1995), 일본(1997)과 스리랑카(2005), 싱가포르(2003), 그리고 베트남(2023)이 각 1편씩이다. 한국과 중국은 없다. 이러니 어찌 베트남영화의 쾌거를 강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은 이들만이 아니다.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에서도 20편 중 5편이 아시아영화였다. 싱가포르 안소니 첸 감독의 중국영화 <더 브레이킹 아이스>를 비롯해 웨이슈준 감독의 또 다른 중국영화 <오직 강만이 흐른다>(河边的错误), 몽골 졸야르갈 푸레브다쉬 감독의 <겨울잠을 잘 수만 있다면>, 이란 알리 아스가리 & 알리레자 하타미 감독의 <지구의 시>, 그리고 김창훈 감독의 <화란>이다.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화란>은 말할 것 없고 두 중국영화의 수준은,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어도 단연 주목을 요한다. 특히 <화란>은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노란 고치껍질 안에서>와 더불어 ’2023 칸의 발견‘으로 손색없다.

<화란>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고등학생 소년 연규(홍사빈 분)이 한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를 만나 위태로운 세계에 투신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누아르성 휴먼 드라마다. 영어 제목 Hopeless가 가리키듯, 희망 없는 세상을 각기 자기만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다 끝내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희망‘(Hope)의 끈을 놓지 않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그 과정과 결말이 가히 ’치명적‘이다. 톱스타 송중기나 신예 홍사빈은 말할 것 없고,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2021, 이미영 감독)에서 주연을 맡은 바 있는 가수 비비(김형서)가 연규의 동생 하얀 역으로 발군의 연기 솜씨를 뽐낸다. 칸 현장에서 만난 감독에 따르면, “비비는 연기 천재”란다.

내친 김에 좀 더 말하면, 비록 경쟁작은 없었어도 올 칸에서 선보인 7편의 한국영화의 선전은 큰 눈길을 끌기 모자람 없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황혜인 감독의 <홀>은 학생 단편 경쟁 섹션인 라 시네프에서 윤대원 감독의 <매미>에 이어 2년 만에 2등상을 안았다. 신참 사회복지사가 점검 차 방문한 남매의 집에서 오래된 노란 장판을 들추는 순간, 커다란 맨홀을 발견하면서 펼쳐지는 24분짜리 공포성 스릴러다. 선 굵은 내러티브에 선명한 주제의식, 완급을 조절할 줄 하는 극적 호흡 등 자기만의 스타일까지 겸비한 수작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 작품인 서정미 감독의 <이씨 가문의 형제들>도, <홀> 같은 스타일은 아니어도 역시 주목할 만한 문제의식과 플롯을 뽐낸다.

<잠>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언급했으니 넘어가자. 홍상수의 <우리의 하루>도 화제리에 선보였으나, 또 하나의 ‘홍상수 월드’이니 굳이 더 부연하지 않으련다. 그야말로 역대급 호응 속에 비경쟁 부문에서 선보인 <거미집>은, <인랑>(2018)의 상대적 부진을 말끔히 씻어내면서 감독 김지운의 화려한 재기를 증거하는 역작으로 손색없다. 흔치 않은 재미에 의미, 주제의식까지 두루 겸비했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결말 부분만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되리라 확신하는 감독(송강호)이, 바뀐 내용도 그렇거니와 검열 현실을 잘 모르는 배우들과 제작자 등을 상대로 갖은 악조건에서 촬영을 밀어붙이며 벌어지는 사건을 ‘김지운답게’, 달리 말해 더할 나위 없이 ‘쿨하게’ 극화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로 ‘칸의 남자’가 된 송강호를 비롯해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크리스탈(정수정), 장영남, 박정수 등이 최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김지용의 촬영은 유려할 대로 유려하며, 모그의 음악 또한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김지운은 이번에 <달콤한 인생>(2005)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 이어 비경쟁 부문만 세 번째 입성했다. 경쟁작이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또한 김지운은 물론 한국영화를 향한 칸의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로 모자람 없다.

올 칸에서 아시아영화의 존재감을 보여준 사례들은 얼마든지 더 들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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