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2023추석영화] ‘천박사퇴마연구소’·’보스톤1947’·’거미집’

우리나라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을 맞아 선보인 영화들을 소개하려면, 좀 더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하는 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더 나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6일에 걸친 황금연휴의 절반이 아직 남은 데다 2, 3일만 지나면 또다시 3일간의 연휴가 다가오니 말이다. 게다가 당분간은 현재의 한가위 영화 구도가 유지될 터이기 때문이다. 강하늘 정소민 주연의 코미디 <30일>(남대중 감독)과 올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성황리에 첫선을 보인 김창훈 감독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비비) 주‧조연의 문제적 한국형 휴먼 누아르 드라마 <화란> 등이 10월 3일과 11일 가세하긴 해도….

일찍이 다른 지면(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882)에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듯, 올 추석을 수놓은 화제작들은 세 편의 한국영화들이다. 강제규 감독이 <장수상회> 이후 8년 5개월여 만에 선보인 <1947 보스톤>과 김지운 감독이 <인랑> 이후 5년여 만에 선보인 <거미집>, 그리고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과 <기생충>(2019, 봉준호) 등의 조감독이었다는 신예 김성식 감독의 장편 데뷔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이다. 이들 가운데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는 <천박사>다. 연휴 3일 포함 개봉 4일째인 30일(토)을 기해 1백만 선도 아직 넘지는 못했어도 말이다.

영화는 후렛샤가 쓰고 김홍태가 그린 미스터리·퇴마 웹툰 <빙의>를 원작으로, 귀신을 믿지는 않아도 귀신같은 통찰력을 지닌 가짜 퇴마사 천박사(강동원)가 일찍이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력한 사건을 의뢰받으며 펼쳐지는 코믹 오컬트 드라마다. 부제의 ‘설경(設經)’은 “귀신을 협박하고 잡아 가두기 위해, 경문과 문양을 한지에 조각한 부적”이다. 판타지이자 공포 미스터리물인 원작을 경쾌한 코믹 활극으로 각색한 플롯과 연출이 우선적인 주목 감이다. 그 이상으로 큰 눈길을 끄는 것은 출연진이다.

강동원에 인간의 몸을 옮겨 다니며 영력을 사냥하는 위협적인 악귀 범천 역으로 개성파 허준호가, 의뢰인이면서도 천박사 못잖게 귀신을 볼 줄 하는 능력을 지닌 유경 역으로 강렬 카리스마의 이솜이, 천박사의 기술 담당 파트너 인배 역으로 캐릭터 배우 이동휘가, <밀수>(류승완, 2023)에서는 악질 해양 경찰 이계장으로, <비공식작전>(김성훈, 2023)에서는 나름 소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외무부 장관으로 분하며 바야흐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천박사의 오랜 인연 황사장 역으로 명품 조연 김종수가, 예측할 수 없는 모험으로 천박사 일행을 이끄는, 유경의 동생 유민 역으로 어린 천배 배우 박소이가 가세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연기파 박정민이 선녀무당으로 특별 출연 나름의 인상적 연기를 뽐내며, 영화 보기의 재미를 한층 제고시켜준다.

적잖은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은 기시감들이다. 코미디의 톤 앤 매너에서는 강동원 주연의 <전우치>(최동훈, 2009)를, 퇴마 모티브에서는 역시 강동원 주연의 <검은 사제들>(장재현, 2015)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미학‧오락적 수준에서는 그 선배 영화들에 이래저래 미치지 못한다. 경쾌함을 노린 웃음에 일말의 페이소스를 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면서, 일종의 치기로 흐르는 지점들이 수두룩하다. 이야기를 추동하는 극적 호흡에서도 적잖이 힘이 달린다. CG(컴퓨터 그래픽)도 그렇거니와 액션도 상대적으로 엉성한 편이다. 영화가 흥미롭긴 해도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일련의 문제작들의 통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까.

<천박사>를 향한 평가가 양분되는 것은 대다수 영화들의 운명인 바, 새삼스러울 것이 없으니 넘어가자. 그럼에도 이 영화가 추석 박스오피스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연유는, 작금의 국내 주요 흥행 코드인 코믹과 액션이 적당히 얼버무려 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영화적 수준에서는 <천박사>를 훌쩍 상회한다고 판단되는 <1947 보스톤>의 46만여명밖에 안 되는 부진한 흥행 성적은 영화가 코믹하지도 않고 (‘범죄도시 시리즈’ 유의) 액션이 결여돼서일까. 대신 이 영화에는 <천박사>나 그 시리즈에는 부재하는 감동이 존재하지 않는가. 동의 여부를 떠나 혹 그 감동이 시도 때도 없이 동원되는 자국비하적 ‘국뽕’이요 맹목적 신파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스톤 1947

3년 전에 이미 완성됐으면서도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개봉을 연기하고 또 연기하다 ‘마침내’ 관객들과 조우한 비운의 <1947 보스톤>은, 1947년 서윤복이 한국 선수 사상 처음으로 ‘KOREA’(코리아)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달고 출전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제51회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와, 경기 못잖게 드라마틱했던 그 전후의 실화를 극화한 휴먼 드라마다. 마라톤을 ‘마라손’으로 썼듯, ‘보스톤’은 보스턴의 당시 표기다. 세계 최고 역사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보스턴 마라톤은 뉴욕, 런던, 로테르담과 함께 세계 4대 메이저 마라톤대회로 간주되고 있다.

영화의 중심 캐릭터들은 서윤복(임시완), 손기정(하정우), 남승룡(배성우) 셋이다. 주지하다시피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해, 영예의 우승과 3등을 차지하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손기정의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였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올림픽에서 마라톤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세계신기록이었단다. 손기정이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그러나,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시상대에서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맞닥뜨린다.

마라톤과 담쌓고 살아가던 1947년 서울, 그와는 달리 코치로서 마라톤과 관계하던 남승룡에 의해 발견된 서윤복이 손기정 앞에 나타난다. 애초에는 서윤복 따위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는 남승룡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바꿔먹고, 사경을 헤매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마라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서윤복에게 전격적으로 ‘보스톤마라손대회’에 나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이 순순히 해결될 리 만무다. 하지만 숱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그들은 보스턴으로 향한다. 손기정은 감독으로, 서윤복은 선수로, 남승룡은 코치이자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인 선수로….

굳이 조금이라도 손을 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 바, 여기서부터는 상기 지면을 고스란히 옮기련다.

보스턴행을 기점으로 양분되는 영화 전반부의 그 ‘우여곡절’을 지켜보는 재미와 감동이 여간 쏠쏠치 않다. 미군정 치하의 대한민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을 했어도, 실질적으로는 아니어서 국제적으로는 ‘난민국’에 지나지 않았다. 고로 어렵사리 대회에 출전했건만, 태극기 아닌 성조기를 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후반부에 펼쳐지는 그 선택과 그 후의 성취가 안겨주는 감동과 재미, 의미, 교훈은 전반부의 우여곡절들 못잖게 깊고 강렬하다. 서윤복의 우승 결과만 알고 있었지, 그 너무나도 극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 포함 108분의 길지 않은 상영 시간이 말해주듯, 영화는 속도감 가득 전개된다. 극적으로 늘어지거나 처지는 순간들이 거의 없다. <은행나무침대>(1996)부터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 <마이웨이>(2011) 등 그의 전작(全作) 중 최강이다. <마이웨이>를 빼곤 강제규의 모든 영화에서 함께 작업해온 이동준의 음악이나, <쉬리>와 <장수상회> 등에서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박곡지의 편집 등이 그 속도감을 완벽히 뒷받침해준다. 일말의 비장미도 곁들이며….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가. 여느 연기 때보다 살을 적잖이 뺀 것이 틀림없는 임시완은 서윤복으로 현현한다. 그의 메소드 연기는 전작 <비상선언>(한재림, 2022)을 능가한다. 예의 프로포폴 논란으로부터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하정우는, <비공식작전>의 생애 최고 연기를 예고한다. 음주운전 사건으로 시사회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배성우 또한 성격화(Characterization)나 연기에서만은 제 몫을 충실히 해낸다. 그들만이 아니다. 김상호는 재미교포 보증인으로 등장해 영화 후반부의 재미를 배가시켜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여걸 박은빈은 서윤복과 썸을 타는 매혹녀로 특별출연해 카메오 역을 톡톡히 수행한다.

그럴 법한데도 신파로 흐르지 않는 극적 생략·절제미도 칭찬감이다. 영화가 내겐 다소 짧다고 여겨진 건 그래서였다. 빈말이 아니라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실제 마라톤 경기 시퀀스가 좀 더 길었더라면, 비판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좀 더 ‘과장’스럽게 갔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느껴진 건 그 때문이었다. 평소 신파의 순기능을 역설해온 내가 그런 감상을 감독에게 전한 것도 그래서였고. 물론 1960대 초반의 ‘꼰대 평론가’로서의 감상일 공산이 작지 않다. 여하튼 이쯤 되면 이 영화, 이번 추석 연휴에 극장을 찾아볼 만하지 않을까. 영화의 비운을 행운으로 승화시켜주면서.” 이런 데도 이 영화가 신파요 국뽕이라고?

거미집

<거미집>의 처참한 스코어에 눈길을 던지면, 실망을 넘어 충격을 받지 않을 도리 없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결말 부분만 다시 촬영하면 걸작이 될 수 있으리나 확신하는 감독(송강호)이, 배우들과 제작자 등을 상대로 지독할 대로 지독한 검열 현실 등 온갖 악조건에서 재촬영을 밀어붙이며 벌어지는 사건‧사연들을 ‘과연 김지운답게’, 더할 나위 없이 ‘쿨하게’(Cool) 빚어낸 수준급 ‘메타-영화’(Meta-Film)….

<1947 보스톤>의 46만여명도 감지덕지다. 20만도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쳇말로 영화가 그렇게 엉망인 것일까? 오십수 년의 영화 보기, 41년여의 영화 스터디, 영화 평론 30년의 내 영화 인생을 걸고 단언하건대, 결코 그렇다고 시인하거나 양보(?)할 수는 없다. 네이버의 실 관람객 평점도 썩 양호한 편은 아니어도, 바닥은 아니다. 7.86점으로 <1947 보스톤>의 8.48점(10점 만점)보다는 낮아도, <천박사>의 7.47점보다는 높다. 한데 <천박사>와 <거미집> 간의 5배 가까운 스코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극단적으로 갈리는 세 영화를 향한 호불호 차는 도긴개긴 아닌가. 빈말이 아니라, 관객들의 선택은 실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올 칸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뒤 <아시아엔> 칸 통신과, 그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한 위 <시사저널> 원고에서도 피력했듯, <거미집>은 “<인랑>의 상대적 부진을 말끔히 씻어내면서 감독 김지운의 화려한 재기를 입증하는 역작으로 손색없다. 흔치 않은 재미에 의미, 주제의식까지 두루 겸비했다.” 평가컨대 그간 맛본 메타-영화 역사에서 <거미집>처럼 재밌고 만족스러운 경우를 기억해낼 자신이 없다. 출연진 및 연기는 어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로 ‘칸의 남자’가 된 송강호를 비롯해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정수정(크리스탈), 장영남, 박정수 등이 최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다른 층위도 마찬가지다. “<헤어질 결심> 등으로 명성이 자자한 김지용의 촬영은 유려할 대로 유려하며, 모그의 음악 또한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역시 <시사저널>을 가져와보자.

“상기 평가는 영화를 본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다. (중략)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70년대를 넘어, 흔히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의리적 구토>(1919) 이후 104년의 제작역사를 지닌 한국영화를 향한 시네필 김지운 특유의 개성 만점의 오마주(경의)다. 영화에서의 묘사도 그렇거니와 나 역시 김감독을 <하녀>(1960)의 김기영 감독을 모델로 했다고 진단했으나, 그렇다고 그 캐릭터를 김기영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캐릭터는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감독을 넘어, 이 영화 <거미집>을 연출하고 있는 김지운, 나아가 세상의 수많은 감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미집>은 영화 속 영화를 통해 영화 현장 일반의 고됨, 드라마틱함 등을 생동감 넘치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며 사유케 한다. 영화 역사에서 숱한 ‘영화에 대한 영화’ 즉 메타-영화들이 존재해 왔지만, 이 영화만큼 보편성을 띤 경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겠는 건 그래서다. <거미집>의 복고풍은 따라서 작금의 극장 영화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위기감들을 지시하는 장치로 읽힐 수 있다. 김기영 이상으로 <거미집>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스릴러 영화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미끼’(MacGuffin)일 수 있다는 것이다.

원만히 합의됐다고는 하나, 그렇기에 김기영 감독의 유족이 ‘송강호가 연기한 김감독이 고인을 모티브로 했을뿐더러 부정적으로 묘사해 고인의 인격권과 초상권을 침해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에는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경우로 한정하자. <하녀>를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최고 영화 1위작으로 여겨왔으며, 윤여정이 첫 출연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화녀>(1971)를 초등학교 4학년 때 극장에서 숨죽여가며 봤던 미래의 평론가는 <거미집>을 보며 김기영을 향한 애정이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이쯤이면 <거미집> 역시 극장을 찾아가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지 않을까.”

사실 올 칸영화제 선정위원회가 <거미집>을 경쟁이 아니라 <달콤한 인생>(2005)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 이어 비경쟁 섹션에 세 번째 초청한 것도, 영화가 그만큼 대중적일 뿐 아니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업적이라 여겨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여겨왔다. 그래 칸에서 역대급 호응 속에 공식 선보인 영화를 보며 나는, <거미집>이 위기 일로에 있는 이 나라 극장 영화의 음울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란 듯 어긋났다.

그간 그 어느 누구보다 영화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Contexts) 및 역사적 맥락은 말할 것 없고 산업적 콘텍스트를 중시해온 비평가이기에, 당혹감을 넘어 일대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한동안 이 흔치 않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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