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강수연, 부처님오신날 하루 앞두고 하늘로···

손 흔들며 하늘로 떠난 배우 강수연, 이제 영화로 영원히 남을 터다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며 반세기 이상 영화에 혼신의 힘을 바친 강수연씨가 7일 오후 별세했습니다. <아시아엔>은 영화와 그를 아끼는 분들과 함께 그의 숭고한 삶을 돌아보며 애도합니다. 아래 글은 별세 하루 전인 6일 정오 무렵 전찬일 영화평론가에게 강수연씨의 쾌유를 비는 원고청탁에 전찬일 평론가가 7일 오후 4시 <아시아엔> 편집국에 보내온 글입니다. 글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강수연 배우와 전찬일 평론가는 부산영화제 집행위 시절 다소 껄끄러운 관계로 ‘악연’도 있었지만, 전찬일 평론가는 강수연씨 쾌유를 비는 글을 정성 다해 써주었습니다. 전찬일 평론가는 “이 원고는 한건의 원고를 넘어 내게 일종의 치유행위가 된 듯하다”는 메시지를 원고와 함께 보내왔습니다. 이 글이 배우 강수연씨와 팬들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편집자>

<씨받이> 포스터

쾌유기원 글이 추모글이 되다…”눈물이 쏟아지네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6)로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으며 일찌감치 ‘월드스타’로 일컬어졌던, 또 한 명의 한국 대표 여배우다.

1969년 4살 어린 나이에 동양방송(TBC) 전속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1976년 <핏줄>(이혁수)과 TBC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의 아역배우로 전격적인 연기 생활에 뛰어들었으며, <고래사냥2>(1985, 배창호)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이규형) 등의 청춘스타를 거쳐, <연산군>(1987, 이혁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 송영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장길수), <베를린 리포트>(1991, 박광수), <경마장 가는 길>(1991, 장선우), <그대 안의 블루>(1992, 이현승), <지독한 사랑>(1996, 이명세),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임상수) 등 성인 연기자에 이르기까지 그 배우 이력은 단연 큰 주목을 요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포스터

“천부적인 끼를 타고난 스타”로, “80년대 중반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 등의 트로이카 체제가 배우들의 결혼 등의 이유로 주춤한 이후 90년대 새로운 여배우 스타들이 몰려올 때까지 강수연은 ‘영화만을 지키는 독보적인 존재’로 영화계의 중심에 있었다.”(여성영화인사전)

한국영화 (제작) 100주년이었던 2019년,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에 10회에 걸쳐 했던 연재 “황정순에서 손예진까지…한국영화 여자배우 10인” 편에서 강수연(姜受延, 1966~ )에 대해 요약‧피력했던 단평을 다소 수정한 평가다. 그때로부터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평가는 유효하다.

그런 강수연이 지난 5일 오후, 뇌내출혈로 인한 심정지로 현재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충격적 비보가 전해졌다. 보도에 따르면, 강씨의 가족은 입원 직후 긴급 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수술 후에도 차도가 없을 수 있다는 의료진 소견을 듣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정지의 구체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바 넘어가자. 강수연이 영화계 포함 많은 이들의 기원에 부응해 기적적으로 회생할지, 그대로 저세상으로 떠날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천만 영화 <부산행>(2016)과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지옥>(2021) 등으로 목하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가, 부디 그녀의 유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 화제의 기대작에서 강수연은, 연합군측 최정예 리더 출신으로 ‘전설의 용병’인 전투 로봇 정이(김현주 분)의 뇌복제와 전투력 테스트를 책임지고 있는 연구소 팀장 서현으로 출연한다. “기후변화로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진 인류가 만든 피난처 쉘터에서 내전이 일어난 22세기, 승리의 열쇠가 될 전설의 용병 ‘정이’의 뇌복제 로봇을 성공시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영화적 수준을 보여줄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작금의 세계적 ‘한류 열풍’과 넷플릭스의 범세계적 유통망 등에 힘입어 그 OTT 영화가 크고 작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연기에서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거의) 없었던 강수연이 화제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미국영화 <미나리>(2021)와, 성황리에 종영까지 마친 Apple TV+ 8부작 웹드라마 <파친코> 등으로 목하 생애의 화양연화를 누리고 있는 ‘윤며들다’ 윤여정처럼….

문득 의문이 밀려든다. 10대는 고사하고 20〜30대 젊은 관객‧시청자 중 강수연이라는 여걸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밀레니엄에 접어든 이후 그녀의 출연작은 빈약하다 못해 초라한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지면 성격상 거론하지 말자. <써클>(박승배 감독, 2003)을 비롯해 <한반도>(강우석, 2006), <검은 땅의 소녀와>(전수일, 2007), <달빛 길어올리기>(임권택, 2011), 다큐멘터리 <영화판>(허철, 2012), 그리고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감독했던 단편영화 <주리>(2012) 정도인데, 대중적 흥행작은 300만선을 돌파한 <한반도> 한 편에 지나지 않는다. 한데 거기서도 그녀는 명성황후 역으로 카메오 연기를 펼치는 데 그쳤다. 물론 그 영화들에도 한결같이 그녀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어도 말이다. TV 브라운관에서는 2001년 최고시청률 35.4%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정난정으로 분해 전인화와 함께 SBS 연기대상 대상을 거머쥐고, 2007년에는 MBC 드라마 <문희>에서 주인공 문희로 인상적 열연을 펼쳤으나, 그들에게는 이미 21년과 15년 전의 ‘오래된’ 일이다.

<경마장 가는 길> 포스터

그렇기에 그가 쓰러진지 3일째, 강수연에 관한 소식들은 물론 그녀의 쾌유를 기원하는 기사들이 쇄도하는 것을 보면서는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십수년간 그녀 없는 한국 영화계는 상상할 수 없다면, 단적으로 ‘안성기의 여성 버전’이었다면 현재의 크고 깊은 애도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늘 칭송의 대상이었던 연기력과 (언급하기 다소 조심스럽긴 하나) 외모로 치자면, 전도연과 문소리, 김혜수, 전지현, 손예진 등의 합이라면 어떨까. 이 땅에 이런 배우가 있었던가, 싶다. “한국영화 100년의 최고 여배우”라 평할 수 있을 최은희나,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칭해졌던 김지미 정도랄까.

출연작들의 영화 예술‧미학적 차원에 대해선 논외로 하자. 항상은 아니었을지언정, 강수연이 선사했던 캐릭터들과 연기의 톤 앤 매너나 깊이와 넓이, 맛과 멋에서 그녀는 으레 “최고”였다. 그녀는 당시의 멜로퀸, 그것도 그 비교의 예를 찾을 수 없으리만치 도발적‧도전적인, 여성성(feminity) 충만한 멜로영화의 여왕이었다.

“그의 출연작을 살펴보면 한국영화뿐 아니라 사회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는 한 매체(5월 6일자 연합뉴스)의 진단은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것이다. 한국영화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www.kmdb.or.kr)에서도 소개하듯 그녀가 소화해낸 역할들은 실로 다양한다.

<미미…>의 발랄한 여대생, 오방살이 낀 한 많은 여인을 형상화한 <됴화>(도화/ 유지형, 1987), 요부 장녹수의 분신이었던 <연산군>, 잡초 같은 접대부로 변신했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가난한 농촌 아낙으로 나왔던 <감자> 등등. “<씨받이>같은 시대물에서 남자들에 의해 운명이 휘둘리는 가냘픈 여인네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베를린 리포트>에서는 혼돈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젊은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토속적인 농염함과 도발적인 현대적 감각이 공존하면서 삶의 어지러움과 절망이 토해진다. <그대 안의 블루>에서 결혼식장을 뛰쳐나와 드레스를 끌면서 아스팔트를 헤매는 여성의 가쁜 숨소리를 강수연이 당대 고학력 여성이 갖고 있던 결혼제도에 대한 갈등과 고민을 보여준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격화 및 연기 스펙트럼에서 전도연과 문소리, 김혜수는 천상 ‘포스트-강수연’인 셈이다. (고)최진실 등의 역할 모델이 다름 아닌 강수연이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이 땅의 연예역사에서 강수연이 수많은 ‘최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나무위키를 간접 참고하면, 강수연은 사상 처음으로 억대 몸값을 받은 여성 연예인이란다. <그대안의 블루>로, 강남의 은마 아파트 네채 값에 달하는 2억을 받았단다. 광고 단가는 편당 4억에 달했단다. <한반도>에서는 카메오 출연만으로 억대 개런티를 받았단다. <여인천하>를 통해 배우 최초로 회당 출연료 500만원 시대를 열었고, 그것을 계기로 고액을 요구하는 톱배우들이 증가했다고 한다.

강수연이 배우로만 걸출했던 것은 아니다. 평소 나서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건만 과거 스크린쿼터 투쟁이 한창일 때는, 수호천사단 부단장을 맡는 등 한국영화를 위한 행동에 적극 앞장섰다. 불미스럽게 퇴진하긴 했어도,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은 공동 내지 단독 집행위원장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끌기도 했다. 김동호 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중앙선데이>에 연재 중인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탄에서 밝혔듯,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를 인연으로 처음 만나 33년간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는 그녀는 1996년 출범 때부터 15년간 “개막식·폐막식 단골 사회자로, 때론 심사위원으로서” 마치 부산영화제 ‘페스티벌 레이디’ 같은 역할을 펼쳤다.

배우 강수연씨와 임권택 감독

그 정도가 아니다. 김동호에 의하면, “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영화제 등 주요 국제 문화·예술 분야의 수상자도 규정을 만들어 훈·포장을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강수연의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축하 파티가 그 결정적 계기였다. “기자회견과 시상식, 크렘린궁의 리셉션에서 집중적인 카메라 세례와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다음날 소련 신문 1면을 장식한 건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우리는 크렘린궁에서 돌아와 공사 직원의 방에서 새벽까지 자축 파티를 열었다. 파티 도중 올림픽이나 국내외 스포츠 경기에서 수상하면 훈장을 수여하는데, 왜 국제영화제 수상자는 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에게 훈장을 받도록 청와대에 건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귀국 뒤 오랜 기간 정부에서 함께 일한 이연택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찾아가 이를 건의하고 제도화했다. 대표단이 청와대를 예방한 날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물론 <씨받이>와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배우 신혜수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아다다>까지 소급해서 감독·배우·제작자들이 훈·포장을 받았다.” 결국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배우 윤여정이 훈장을 받은 것도 그 연장”인 것이다.
김동호는 다음과 같이 상기 원고를 끝맺음한다.

“강수연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곧바로 ‘배우’가 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부산영화제를 이끌 정도의 리더십이 있는 건 물론, 무엇보다 명석하고 창의적이어서 이따금 강수연에게 어려운 일을 상의한다”고.

필자는 첫 4년은 프로그래머로, 뒤이은 4년은 아시아필름마켓 부위원장과 영화연구소 소장으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부산영화제에 몸담았다. 나는 2015년과 2016년 2년을 강수연과 함께 했다. 돌이켜보면 위원장과 연구소장으로 그 2년은, 편치 않았다. 배우인 그녀에겐 5년 연상의 평론가인 내가 적잖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자의 반 타의 반 부산영화제를 떠나는 과정에서 평생 잊을 수 없을, 이 지면에선 상술할 순 없는 그녀와의 ‘악연’이 발생했다. 그 악연은 그 이후로 줄곧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악연을 넘어 다른 이들 못잖게, 아니 그 이상으로 나는 강수연의 쾌차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결코 쓰기 수월치 않은 이 원고가 그 증거 아니겠는가. 나는 강수연과의 악연을 인연으로 승화시키고 싶고, 그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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