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보기] ‘영화제 정치학’을 떠올리다
2014 베를린영화제, 중국 ‘초강세’
2014년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지난 2월16일, 총 11일 간 대장정을 마쳤다. 수상 결과에 상관없이 20편의 경쟁작들을 중심으로 말하면, 이번 영화제에서는 중국 영화 (초)강세가 두드러졌다. 무려 세 편이나 됐다. ‘중국 6세대’ 대표 주자로 자리 잡은 러우예 감독(<수쥬> <여름궁전> <스프링 피버>)의 <맹인안마>를 비롯해 댜오이난(<방직성 경찰> <야간 열차>)의 <백일염화>, 닝하오(<몽골리안 핑퐁> <크레이지 스톤>)의 <무인구>가 그 세 편이다. 세 감독 모두 베를린 경쟁 부문 초청은 처음이다. 다른 아시아 영화로는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로 유명한, 80대 초반 노장 야마다 요지의 일본 영화 <작은 집>이 유일했다.
주 제작국 기준으로 독일의 4편에 이은, 최다 편수였다. 전통 영화강국들인 프랑스, 미국, 영국 등도 각각 2편, 1편, 2편에 불과했다. 대체 중국영화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들의 영화가 과연 그만큼 새롭고 창의적인 걸까. 미국을 위협하는 정치·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영화적 위상을 증거하기라도 하는 걸까. 한국 영화의 경쟁 진출 실패를 두고 국내 언론계에서 유난히 더 유감스러워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 영화는 목하 역사적 호황을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시장적·상업적으로는.
한 매체 (<일간스포츠> 정지원 기자)는 영화계 관계자의 입을 빌려 “한국 영화시장이 커져 주목도를 높이고 있지만 상업영화로 치우치면서 예술성 높은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몇몇 감독들 작품이 없다고 아예 세계 3대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자체가 무산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따끔한 지적이다. 베를린으로 향하기 하루 전, 또 다른 매체의 한 기자도 전화를 걸어 비슷한 취지의 질문을 하며 아쉬움을 피력했다. 이 글은 그 때 그 기자에게 들려준 내 의견에 대한 보다 상세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관계자의 일성을 가리켜 “일견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딱 절반만!”이다. 그 일성은 이른바 ‘영화제 정치학’에 다소 둔감한, 감정적 한탄에 가깝다고 판단되기에 하는 말이다. 영화제의 정치학이라? 국내외 그 어느 영화제든 해당 영화제는 거의 예외 없이 특유의 영화적 취향·지향 등에 근거해 영화를 초청하고 수상을 결정하곤 한다. 다름 아닌 그 정체성과 방향성이 영화제 및 영화상의 정치학인 바, 사실 위 관계자나 기자의 말에 그 요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몇몇 감독들의 작품이 없다”는 것이나, “김기덕·박찬욱 등 세계 3대 영화제가 주목하는 국내 감독들이 신작을 내놓지 않은 상태” 등의 진술이 그것이다.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는 말할 것 없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은 으레 예의 작가주의(auteurism)를 고수해왔다. ‘작가(auteur)’는 전작(全作, œuvre)에 걸쳐 스타일 등 영화의 어떤 층위에서건 감독 고유의 개성을 일관되게 지속시켜온 감독을, 여느 진부한 감독들과 구분지어 일컫기 위해 1950년대 이래 문학에서 차용, 사용해 온 영화 전문용어다. 이들 영화제들은 이미 검증된 감독들의 신작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정확히는 신예나 미지의 혹은 덜 알려진 감독들의 영화가 아닌, 국내외적으로 연출력이 입증되거나 명성이 구축된 감독들의 영화에 무게중심을 둔다. 그것은 곧 그들이 발견·발굴보다는 추인·확인에 방점을 찍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들 영화제들의 경쟁 라인업이 그 밥에 그 나물이기 십상인 까닭은 무엇보다 그래서다.
장편 데뷔작이 세계 3대 영화제 경쟁 부문에 곧 바로 입성하거나 수상하는 경우는, 설사 있더라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26세인 1989년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으나, 미국이란 배경 없이도 그런 기념비적 쾌거가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1994년 칸을 정복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두 번째 장편 <펄프 픽션>처럼 혁신적·압도적 문제작을 빚어내기도 쉽지 않다. 그 기념비적 성취는 2년 전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로 세계의 숱한 영화제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었기에 가능했을 터였다.
영화제 입성은 목적 아닌 수단일 뿐
베를린영화제가 그 동안 중국(권) 영화에 보내온 성원 내지 호의를 상기할 필요도 있다. 1988년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에 영예의 황금곰상을 안겨주면서 제5세대 열풍의 결정적 기폭제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영화제는 이후 1993년 대만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과 공동으로 중국 시에페이의 <황혼녀>를, 2007년 왕취엔안의 <투야의 결혼>을 승자로 만들었다. 64회를 거치며 중국 영화 품에 3차례나 최고상을 안긴 것이다. 한국 영화에 아직은 그 영예를 안긴 적이 없다는 현실 등을 고려하면 각별한 지지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성 높은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도 그다지 설득력이 커 보이진 않는다. 당장 올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거머쥔 <한공주>(이수진 감독)나, 그보다 3년 전 그 상 등을 두루 수상한 <무산일기>(박정범), 고작 300만 원으로 완성시켜 지난 해 베를린 파노라마 섹션 등에 초청됐던 <가시꽃>(이돈구) 등 적잖은 문제작이 즐비하거늘, 세계 3대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지 못했다고 해서 위와 같은 단언을 내릴 수 있겠는가. 세계 3대 영화제 경쟁 입성이 예술 영화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도 없지 않은가.
영화제는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감독으로서 인정을 받거나, 보다 더 많은 관객과 조우할 수 있는 절호의 수단일 따름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곤 했지만,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수천 편의 영화 중 20편 전후의 경쟁 부문에 선정, 초청된다는 것이 어찌 손쉬운 일이겠는가. 그 안에 들 수도 있고, 못 들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가령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외국어상 부문 예비 후보 9편에 든 적이 없다고, 그만큼 질적으로 형편없고 뒤떨어진다고 단정해야 할까.
평론가로서 관객으로서, 우리 영화의 과도한 상업성이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상업성이 자국 관객의 뜨거운 사랑의 결과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제 아무리 상업성의 길을 치닫더라도 일반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법. 상업성에 대한 평가도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세심해야 한다. 홍콩 영화가 예의 화려한 위상을 잃어버린 건 상업성이 아닌 예술성으로 치달았기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