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 ‘판도라’···2016 ‘한국영화사’ 빛낸 두 문제작
‘박근혜 게이트’ 등 악재 속에서도 4년 연속 연 관람객 2억 돌파
[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때늦은 감이 있으나 아직도 2016년의 한국영화계를 뒤돌아보려는 건 어떤 미련 때문일 터. 평론가로서 그 중요 이슈를 충분히 짚지 않았다는 일련의 아쉬움들이랄까.
지난해 11월 23일자 <아시아엔>에 게재된 때 이른 한국영화 결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다소 일찌감치 2016년 한국 영화계를 결산해 본다면, 그 중 하나는 다큐멘터리(이하 ‘다큐’)의 선전이 아닐까 싶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다큐의 본령 중 하나가 사회 고발 내지 사회(비판)적 메시지의 설파라면 특히 더 그럴 터다. 무엇보다 ‘올해의 다큐’라 할 수 있을 두 시사다큐 <자백>과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덕분”이라고. 그렇게 선전한 것에는 두 기념비적 다큐에 이어 상술한 고희영 감독의 휴먼 감동 다큐 <시소>도 포함된다.
이 세 영화가 남긴 감흥은 강렬히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향후로도 꽤 오래 그럴 공산이 크다. 그 간 극영화에 비해 다큐에 덜 관심을 기울여온 내게 그들은 다큐의 의미와 소중함을 새삼 각인시켜줬다. 한 일간지(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76169.html) 요청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2016년 영화에서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결정적 장면’으로 “몸 전체에서 성한 데라곤 고작 얼굴 밖에 없으면서도 자력으로는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 그 얼굴 표정들은, 사십 수년에 걸친 내 영화 인생에서 맛본 최상의 감동적인 클로즈업들”이라며 이동우-임재신 두 중년 장애남의 우정과 사랑을 추적한 다큐 <시소>를 선택한 것도, 한국영화에 대한 총평에서 <무현, 두 도시 이야기>와 <자백> 두 다큐를 꼭 짚어 언급한 것도 그래서였다.
내친 김에 그 총평 전문을 다시 옮겨보면 어떨까. 상기 미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날로 악화되고 있는 영화산업의 독과점, 양극화로 인한 빈익빈부익부의 심화 등 와중에도 영화를 향한 한국 관객들의 관심·애정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새삼 드러난 유의미한 한해였다. 이러저런 악재에도 불구하고 4년 연속 연 관람객 수 2억 명을 돌파했으며, 그 중 한국영화는 1억 관객 이상을 동원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강타했던 11월에도 관객 수와 매출액 감소치가 17%와 13%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탄탄한 위상을 역설적으로 증거 한다. 장르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던바, 제작비 조달 및 스크린 확보 등 숱한 고난을 뚫고 완성돼 선보인 사회고발성 다큐멘터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와 <자백>은 2016년 한국 다양성 영화 1위와 4위를 차지했으며, <터널>과 <판도라> 등은 사회(고발)성 짙은 한국형 재난 영화의 어떤 잠재력을 입증했다.”
2014년의 <다이빙 벨>을 넘어 이명박 정권 이래 줄곧 직·간접적으로 자행되어온 ‘정권 탄압’으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밝혀진)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나 그 탄압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수치스러운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영화 포함)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지난 수년 간 무용론에 시달려온 것만으론 성에 안 차는지 급기야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 등 8개 영화단체들로부터 부적절한 자금 유용 등으로 위원장과 사무국장 등 수뇌부가 고발을 당한 영화진흥위원회표류건 등 그밖에도 2016년의 한국영화계에 대해 할 말은 수두룩하나, 삼가련다.
그저 두 편의 문제적 영화들에 대해 간단히 말하는 것으로 대신하련다.
2016년의 내 한국영화 베스트 1위작인 <동주>를 비롯해 <부산행>(5위)에서 <덕혜옹주>, <터널>(3위)에 이르는 2016년 여름의 화제작들에 대해서는 이미 아시아엔을 통해 상술한바, 넘어가자. <곡성>, <아가씨>(4위), <밀정> 등도 넉넉히 주목 받았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상찬들이 주어졌으니 비켜가련다. 먼저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
단적으로 범죄 액션 스릴러 물의 ‘끝판왕’이라 할 만한 한국영화사의 문제작 수작이다. 예의 선악 구도를 완벽히 와해시키며 선인을 단 한명도 등장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살려놓지 않고 다 죽여 버리는 영화는, 그야말로 씨네아티스트 김성수가 제시하고픈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가슴 아린 축약도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386세대)는 연대책임이 있다. 불나방 같은 헛된 욕망에 들끓기도 했었고, 이후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중년으로 접어든 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많이 후지다. 공공의 선이어야 할 경찰, 사법정의의 표상이어야 할 검찰, 범죄의 그늘을 없애야 할 정치인이 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악의 축이 돼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간다. 이런 후진적인 부분에 화를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순치돼 말을 잘 들으면 안 된다. 지옥행 급행열차를 탄 대한민국의 현실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이 영화에 담으려고 했다.” 이 얼마나 염치 있는, 이 나라의 대다수 권력자들과 대조되는 반성적 소망인가.
허나 감독의 작의는 물론 그가 그린 축약도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극단적이다. 세상이 제 아무리 극악무도해지었을지언정 어찌 악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선만 존재할 수 없듯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악의 공존이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하지만 그건 누구나 아는 통속적 진리, 감독은 결국 그 통속성에 도전을 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극단성이 영화 <아수라>의 선호를 가르는 으뜸 덕목이자 흠이다. 영화가 그토록 극단적 선택을 뚫고 260만에 달하는 흥행 성적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목 덕분일 테며, 그와 반대로 기대에 현저히 미치지 못하면서 그 정도 흥행선에서 멈춘 건 그 선택이 대중 관객들에게 적잖이 부담스러워서였을 게다.
나는 감독의 선택에 시쳇말로 ‘뻑’이 갔다. 그 극단 속에서 위 인터뷰에 내포된 융숭한 진정성을 감지했기 때문. 개봉 전 시사에서 영화와 조우한 후 그 강렬한 감흥을 제작자 한재덕 대표에게도 전했듯, 향후 이런 유의 영화 만들기에서 어떤 기준으로, 그것도 지속적으로 호출된다면, 그래서이리라.
김성수 본인을 넘어 김지운 박찬욱 박훈정(<신세계>), 나아가 타란티노의 아우라까지 끌어들여 솜씨 있게 김성수 식으로 뒤섞었다고 할까. 이 영화를 <밀정>과 <악마를 보았다>(2010), <저수지의 개들>(1992) 등의 종합으로 요약한 건 그 때문이었다. <아수라>를 2016년의 한국영화 베스트 2위에 위치시킨 것도 그렇고.
내 베스트 5위 안에 들진 못했어도, <판도라>도 한국영화사적 함의에서, 특히 제재의 모험성, 시의성 등에서는 <아수라>를 능가한다. 그 무엇보다 원전 드라마는 그간의 한국영화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일반역사의 최대 금기 중 하나였기 때문.
소위 영화적 완성도에서도 평균 이상의 무난한 수준은 유지한다. 컴퓨터그래픽에 의한 특수 효과도 수준급이다. 플롯의 완급 조절에서 다소 쳐지는 지점들이 있고 더러는 신파로 흐르기도 하나 흠이 될 정도는 아니다. 개인 캐릭터들을 희생시키는 동기를 국가가 아닌 가족으로 설정한 것하며, 우정 및 멜로드라마도 적절한 편이다.
김남길, 김주현, 정진영, 김영애, 문정희에 이르는 주연진의 연기들도 최상은 아니어도 호연이라 평할 만하다. 영화의 유감은 드라마의 속내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이 땅에서 블록버스터 급 원전 드라마를 극화해 선보임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데는 성공했다. 그 복마전으로서 원전 마피아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하면서 극적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적 한계로만 단죄할 수는 없다. 그 한계는 여전히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말로만 민주 공화국인 이 대한민국의 현실적 한계로 다가선다. 아는가? 영화 <변호인>은 명백히 (고)노무현 전 대통령을 극화한 드라마이건만, 그 때문에 영화에 관련된 개인이건 단체건 크고 작은 압박·탄압들을 실제적으로 받아왔음에도, 공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천명하지 못하(거나 않)는 엄연한 현실을? <판도라>에서 가장 설득력이 떨어지는 극적 설정은 대통령을 선한 인물로 그리고 총리를 악당으로 그린 선택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 국민을 위해 고민하고 총리와 갈등·충돌하는 대통령이라니, 그 얼마나 가당찮은 ‘비현실적’ 설정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혹시 <판도라>의 흥행 스코어가 5백만 선을 채 넘지 못한 결정적 이유도 실은 그런 극적 괴리 때문은 아닐까? 지진은 아직 서울 등 타 지역 주거인들은 겪지 못한, 경주 등 일부 남부 지역만의 비극적 사건이라는 인식도 없진 않을 테고. 그게 결코 아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