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에서 ‘문라이트’로 수상한 반전····’2017아카데미 시상식’이 남긴 묘한 여운들
[아시아엔=전찬일 <아시아엔> ‘문화비평’ 전문위원, 영화평론가, 조선대대학원 초빙교수] 지난 2월 27일 ‘2017아카데미시상식’의 크고 깊은 여운이 아직도 내게서 떠나질 않고 있다. 아카데미상(일명 오스카상)이 200여개국 수억명의 시청자들에게 생중계됐다고는 하나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이자 리그다.
올해 89회째나 되는 오래된 시상식이지만 우리와 직접 관련 있는 거의 유일한 부문은 1957년 29회부터 도입된 최우수외국어상이란 점 등을 고려하면, 그 여운은 예외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시간에 가까운 생방송 중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도 실은 난생 최초였다.
아카데미, 아니 이 지구상의 모든 시상식 사상 최대사고이자 해프닝이라 할 수도 있을 최우수작품상 번복 광경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다름 아닌 그 행운이 餘韻의 첫 번째 이유다. 초대형사고로 해당 스태프가 해고되고, 아카데미위원회측은 씻을 수 없을 오욕을 남겼기에, 다소 조심스럽긴 하다.
주지하다시피 2017 오스카상의 최종 승자는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였다. 미국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흑인소년의 사랑과 (성)정체성을 축으로 펼쳐지는 가슴 시린 성장의 감동 휴먼 드라마. 영화는 남우조연상(마허샬라 알리), 각색상(배리 젠킨스) 그리고 작품상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애초에, 어느덧 80줄에 접어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1967, 아서 펜 감독)―더스틴 호프만, 앤 밴크로프트, 캐서린 로스 주연의 <졸업>(1967, 마이크 니콜스)과 더불어 이른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서막을 장식한 그 도발적 명작!―의 클라이드 워런 비티의 입에서 호명된 영화는 <문라이트>가 아니라 <라라랜드>(데이미언 셔젤)였다.
“LA와 할리우드 전체를 뮤지컬 무대 삼아 펼치는 풍성한 시청각의 향연과 상상하는 대로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는 영화”요, ‘고등학교 때까지 재즈 드러머를 꿈꿨던 감독’이 “전작 <위플래쉬>에서는 재즈에 대한 애증을 드러냈다면”, 이제는 “재즈를 닮은, 재즈의 세계 구성 방식을 빌려”와 아예 “재즈가 된 영화”(이상 서영호, <201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주제가상(City Of Stars), 음악상(저스틴 허위츠), 감독상 등 이미 6관왕을 차지한 영화가 최종 7관왕에 오르며 마무리될 참이었다.
그 어느 해보다 열띤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올 오스카시상식의 으뜸 관전 포인트는 13개 부문 14개 후보로 지명된 <라라랜드>가 과연 몇 개의 상을 거머쥐느냐 여부였다. 내심 <문라이트>나 다른 영화가 가져가길 원했으나, <라라랜드>의 작품상 수상은 문제될 게 없었다. 아니, 당연한 감마저 없지 않았다. 헌데 무대에 오른 <라라랜드> 제작자가, 작품상은 자기 네 영화가 아닌 <문라이트>라면서 수상 결과가 적힌 종이까지 보여주며 정정하는 해프닝을 펼치는 게 아닌가.
혹자는 눈치 챘겠지만 사실 사고는 예고되고 있었다. 시상자인 워런 비티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시간을 끄는 게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가 스태프의 실수로 잘못 받아든 것은 여우주연상(엠마 스톤)의 <라라랜드>였지 작품상의 <라라랜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이 탓은 하지 말자. 노장을 비난하려는 건 더욱 아니다.
그렇더라도 만약 워런 비티 옹이 그 오류를 간파하고 시정할 수 있을 예의 그 총기 내지 기지를 팔순이 된 지금도 여전히 지니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올 오스카는 사고 아닌 해프닝으로 귀결되면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 특유의 강렬한 저항정신으로 反트럼프적 분위기로 달렸던 시상식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한편 해프닝 아닌 그 대형사고는 일말의 위안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격언은 너무 상투적이니 넘어가자. 미국 같은 세계 최고의 슈퍼파워국도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초보적인, 하도 초보적이어서 상상조차 불가능한 실수를 저지른다는 데서 연유하는 위로랄까. 비상식적이며 반서민적일 뿐 아니라 그토록 싫어한다는 거짓말을 밥 먹듯 일삼는 이를 대통령을 뽑는 건 비단 대한민국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현실을 확인하는 데서 맛볼 수 있는 ‘웃픈’ 안도감??.
2017 오스카시상식이 남긴 또 다른 여운은,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온 영화상·영화제의 정치학과 연관된 것이다. 러우예 감독의 <맹인안마>를 비롯해 댜오이난의 <백일염화>, 닝하오의 <무인구>에 이르는 3편을 경쟁 부문에 진출시키며 중국영화의 초강세를 과시한 것을 넘어 황금곰상(<백일염화>)까지 거머쥐는 등의 파란을 일으켰던 2014년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다녀온 뒤 <아시아엔>(“‘영화제정치학’을 떠올리다” )에도 피력했듯, “국내외 어느 영화제든 해당 영화제는 거의 예외 없이 특유의 영화적 취향·지향 등에 근거해 영화를 초청하고 수상을 결정하곤” 하는 바, 영화상 역시 마찬가지다.?
총 24개 부문 중 다른 부문들은 17개 분과에서 서류나 온라인으로 투표해 선정되지만, 작품상의 경우는 전체 회원들이 참여해 결정된다. 미 아카데미위원회 회원들이, 제 아무리 뮤지컬 영화에 인색하고 휴먼 드라마에 후한 평가를 보이곤 한다 한들 자신들의 성향에 훨씬 더 잘 부합했을 <라라랜드>가 아니라, <문라이트>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영화상의 정치학을 떠나서는 설명될 길이 거의 없다.
미 아카데미위원회 회원들이, 제 아무리 뮤지컬 영화에 인색하고 휴먼 드라마에 후한 평가를 보인다 한들 자신들의 성향에 훨씬 더 잘 부합했을 <라라랜드>가 아니라, <문라이트>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영화상의 정치학을 떠나서는 설명될 길이 거의 없다. <문라이트>는 미니멀리즘적 스타일 등에서 유럽 작가주의 영화의 흥취를 물씬 풍기며, 그 속내에서는 불편하다 못해 불쾌했을 수도 있을 법했기에 내리는 진단이다.
영화의 수준도 물론 출중하긴 하나, 트럼프 체제가 들어서며 날로 악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까. 최근 인종차별적이라는 등의 크고 작은 비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도 작용했을 테고.
상기 여운들 중 가장 강력한 여운은 그러나 할리우드의 어떤 건강성과, 수상작들은 말할 것 없고 후보작들의 주목할 만한 수준에서 발생한다. 트럼프의 反난민정책 등에 항의해 일찌감치 시상식 보이콧을 표명한 이란의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에 외국어영화상 트로피를 선사한 그들의 선택에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5년 전 이란영화 사상 처음으로 그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 같은 상을 안겨줬다.
그 다양한 면면은 할리우드를 넘어, 한때는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비난을 듣기도 했던 미국영화들에 대한 이러저런 편견·고정관념을 뒤흔들기에 모자람 없다. 총 9편의 작품상 후보작 중 <펜스>(덴젤 워싱턴)와 <로스트 인 더스트>(데이빗 맥킨지)는 보질 못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그 고른 영화적 수준은 주목을 넘어 감탄에 값한다. <문라이트>와 <라라랜드>만이 아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케네스 로너건), <컨택트>(드니 빌뇌브), <핵소 고지>(멜 깁슨), <히든 피겨스>(씨어도르 멜피), <라이언>(가스 데이비스) 등 그 어느 영화 하나 놓치기 아깝다.
원제 ‘Arrival’을 살렸어야 마땅했을 <컨택트>가 음향편집상(실뱅 벨레마르)에 그친 것은 못내 아쉽다. 다른 부문은 몰라도, 각색상만은 영화화가 불가능하다 간주돼온 테드 창의 동명 단편 원작을 놀라운 상상력·연출력으로 빚어낸 이 휴먼SF 걸작에 안겼어야 했다. 문자를 통해 외계인과 소통하는 언어학자 루이스 역의 에이미 아담스는 여우주연상에 후보지명 됐어야 마땅했고. 영화는 21세기가 낳은 고전적 걸작 <그을린 사랑>(2010)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웅변해준다.
나아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안달 나게 한다. 이런 푸념이나 감상평이야 넘치고 넘칠 테니 이쯤에서 멈추자. <컨택트>와 함께 ‘2017년의 영화’로 내게 머물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대한 감상만 간단히 남기련다. 각본상(케네스 로너건)에 이어, 과거의 성추문에도 아랑곳없이 골든글로브에 이어 오스카 남우주연상(케이시 애플렉)까지 거머쥔 화제의 걸작이다.
보도자료를 빌려 줄거리를 옮겨보면, 보스턴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며 혼자 사는 리(케이시 애플렉)는 어느 날 형 조(카일 챈들러)가 심부전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맨체스터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지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란에 빠진 리는 조카와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패트릭은 떠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한다. 한편 전 부인 랜디(미셸 윌리엄스)에게서 연락이 오고,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르게 되는데?.
이렇듯 평범하다 못해 사소할 대로 사소한 개인사를 통해 영화는 전율이 일 정도의 육중한 긴장, 감동, 울림, 여운을 두루 선사한다. 130분여의 짧지 않은 러닝 타임에도, 감상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군더더기라곤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섬세한 플롯을 펼친다. 성격화와 연기를 지켜보는 맛만으로도 벅차다. 케이시의 연기는 ‘생애의 연기’라는 평가로는 부족하다. 가히 역사적 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편집은 편집 일반의 정수로 손색없다. 개별 음악의 감흥도 그렇지만, 음악 배치는 근자에 경험한 영화음악 중 단연 베스트다.
또 한번의 푸념을 늘어놓는다면 올 오스카 음악상은 잘 들리다 못해 너무나도 뻔한(?) <라라랜드>가 아니라 잘 들리진 않아도, 편집이 그랬듯 영화 음악의 진수를 구현한 이 영화의 품에 안겼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후보지명조차 안 됐지만 말이다. 단언컨대 영화의 전 층위에서 최상의 경지를 일궈냈으며, ‘기적의 소품’이라 할 만하다. 2016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은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이래저래 올 아카데미시상식이 안겨준 크고 깊은 여운들은,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속될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