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1908년 무신생이다. 아들에게 보내신 편지가 그리 많진 않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일괴공(一槐公) 조부께서 당신 아드님들의 일본식 학교교육을 일절 거절하고 오로지 마을 서당에만 다니게 하셨다. 그
Author: 이동순
“김병걸 선생님 ‘애타게 울어대는 밤벌레 소리’ 듣고 싶습니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지난 1974년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은 파쇼적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그 중 53조인 ‘대통령긴급조치권’이란 괴물조항으로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민주인사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그리움에 사무치는 제자 구영일, 새해엔 꼭 만나세나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나의 그리운 옛 제자 영일에게…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한 지가 어언 34년 세월로 훌쩍 접어드는구나. 사람의 한 생을 살아가며 거두고 기억하고
“새해는 왔는가?”···이동순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새해가 왔는가 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손님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 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 내 서가의 해방기념시집의 찢어진 표지 그 위를 번져가는
“‘철조망 조국’ 뛰어넘어 신명나는 새해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정호경 신부 엽서를 또 찾았다. 편지를 잘 안 쓰시는 신부님께서 두 통이나 엽서를 보내셨다. 상주 함창성당 주임신부로 계실 무렵이다. 글을 읽노라니
“때는 바야흐로 신춘문예 시즌···가슴 설레는 고질적 질환”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때는 바야흐로 신춘문예 시즌이다. 전국의 신문사마다 성탄 직전에 각 부문 당선자가 결정되었고, 통보도 갔을 터이고 당선소감과 사진, 심사평도 진작 받아두었을 것이다.
“고은 선생님, 불세출 명작으로 불명예 회복하소서”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백석시선집> <개밥풀> 등 저자]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며 노경(老境)에까지 자신을 잘 지키고 무탈하게 지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평생 다 살고 미수(米壽)의 나이에 이르러
‘군사독재 부역’ 스승께 40년만에 묻다···”그 길 굳이 가셔야만 했나요?”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은 내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의 지도교수였다. 학부시절부터 워낙 강의에 심취하고 시인적 풍모에 몰입했던 터라 그분을 대학원 지도교수로 모신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읽는 박용래 시인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성탄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축복과 사랑과 나눔의 기쁨을 함께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날이다. 모처럼 화이트크리스마스 소식도 들린다. 청년들에게 성탄절은 설레는 날이다.
거리두기 안중에도 없는 까마귀떼 ‘부럽고야’
한 해가 간다고 까마귀들이 전깃줄에 모여앉아 온종일 왁자지껄 녀석들에겐 거리두기 따위도 거추장스런 규범인가 보다. 하루 해도 저물고 한 해도 뉘엿뉘엿 저물고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먼 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 “염치없는 부탁이오나”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눈 내리는 소리를 ‘어디 먼 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그려낸 시 ‘설야(雪夜)’의 시인을 아시는지? 김광균(金光均, 1914~1993)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행풍우'(士行風雨)···타는 목마름으로 1987년 12월이나, 오늘이나
참으로 귀한 편지와 글씨 하나를 찾았다. 우리 시대의 소설가 김성동(金聖東, 1947~ )이 울분에 차서 거리를 쏘다니다 돌아와 분연히 편지를 쓰고 또 먹을 갈아서 떨리는 손으로
6.25 직후 대구, 아스라한 유년의 또렷한 기억
1953년,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대구로 터전을 옮기셨다. 아내와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고향마을이 꼴도 보기 싫고 지긋지긋했으리라. 그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크지 않은 농토를 경작하던
고농축의 정성과 관심과 우정, 사랑, 게다가 성원과 격려까지 빼곡이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새로 발간된 시집을 여기저기 지인들께 보내면 대개 잘 받았다는 답신들이 어김없이 오곤 했다. 하지만 그 답신이란 게 거의 천편일률로 의례적인 것들이
80년 전 부친의 곤고했던 일본생활을 떠올리며, 시인은···.
아버지는 1940년 4월에 일본으로 가셨다. 그때 나이는 33세, 아내와 어린 자녀를 고향집에 둔 채 극도의 가난 속에 일자리를 찾아 가셨다. 목적지는 일본의 고쿠라(小倉), 발전소 건설현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