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사무치는 제자 구영일, 새해엔 꼭 만나세나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나의 그리운 옛 제자 영일에게…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한 지가 어언 34년 세월로 훌쩍 접어드는구나. 사람의 한 생을 살아가며 거두고 기억하고 챙길 사람은 꼭 챙기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못내 허술하고 부실한 존재가 인간인가 보네.
자네야말로 내가 거두고 챙겨야 할 잊을 수 없는 사람인데도 말일세. 나의 인생 구간에서 자네는 정말 내가 잊을 수 없는 사람일세. 왜냐하면 우리는 스승과 제자로 만났고 서로에게 비교적 충실한 편이었지. 나도 선생으로서 제자인 자네를 그나마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자극과 일깨움을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었네.
자네도 이런 내 뜻을 잘 간파하고 열심히 독서 궁구(窮求)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어. 더욱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나는 자네를 내 연구실로 불러 앉혔었네. 그 시절 자네는 참으로 충직했었네.
내 연구실 서가의 책들을 열심히 탐독하고 옛 자료와 문헌을 검색하는 노력이 진지했었지. 늘 잘 웃고 서글서글하지만 무언가 불의를 보고 왈칵 분노하는 성격은 그야말로 불칼과도 같았었네. 그런 성격마저도 잘 다스리며 조절하라고 타이르던 어느 날 오후의 추억도 떠오르네.
부모님을 어려서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던 자네의 성장기 고독과 아픔을 기억한다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고 버티기가 어려웠을 것인가? 자네는 나를 아버지처럼 때로는 형님처럼 친근함으로 대하고 응석도 부렸어. 그 마음, 그 심정을 내가 왜 눈치 채지 못할까?
그런데도 인문학에 대한 탐구심과 열정, 선악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분별심은 그 누구보다도 엄정하고 확실하고 단호했었지. 그런 자네를 내 제자로 두어서 행복했다네. 내 문하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더 공부를 계속 이어갈 시기에 나는 청주를 떠나 대구로 일터를 옮기게 되었네.
뜻밖에도 지도교수를 왈칵 잃어버리게 된 자네의 마음 속 충격과 고통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자네는 그 어떤 서운함의 표시도 없이 내가 이삿짐 꾸려서 트럭에 싣고 떠날 때 그 모든 일을 앞장 서 주도하며 심지어 그 트럭에 타고 길잡이까지 해서 내 새로운 일터로 옮겨주고 떠났지. 그런 감동적 장면들은 모두 내 가슴 속에 담겨있다네.
자네는 결국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의 농민신문 기자가 되어 청주를 떠났지. 그 후 몇 차례 안부전화만 나누었고 무심한 세월을 수십 년이나 흘러 보내었다네. 오늘 자네가 보내준 옛 편지를 스크랩북에서 모처럼 찾아 꺼내 읽으며 추억 속의 자네 모습을 떠올리네.
자네가 불쑥 연구실 문을 열어젖히고 활짝 웃으며 들어올 것만 같네. 언제 어디서나 굳세게 잘 살아가기를 비네. 나의 사랑하는 제자 구영일군은 내 가슴 속에서 영원하다네.
2021년 12월 30일
선생님,
항상 모두에게 인자하신 미소로 대하시면서도 준열하리만큼 반성과 겸손을 잃지 않으시는 선생님. 어느 웅변보다도 꿋꿋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시는 선생님의 자세를 뵐 때마다 머리 숙여집니다.
입학 후 04동의 나무층계를 오르내리며 듣던 <현대문학사>의 카랑한 음성. 자주 붉은 얼굴로 찾아가 뵈도 꾸지람 한 마디 없으시던 연구실의 선생님.
2학년이 3학년에 끼어 유독 강의가 끝나기를 아쉬워했던 <현대시론>. 꼼꼼히 한 사람 한 사람의 과제물을 봉투에 모아 주시며 ‘잘 간직했다가 차후에 참고가 되게 더 보충하게’ 하시며 내주시던 손길.
학생들의 <현대시강독>의 무성의한 발표에 화가 나 ‘이것도 발표냐’는 저의 오만불손함에도 그런 얘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선생님의 주의 깊은 격려.
부족하고 엉성한 저의 “심훈론”을 인문대 학술발표대회의 최우수상으로 뽑아주시고 여러 모로 신경 써주시며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제 발표를 보고가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현대시창작론>의 보살사 뒷산의 산상(山上) 강의. 불편하신 건강에도 불구하고 편저하신 <백석시전집> 등은 다시금 선생님의 열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분에 넘치는 염려와 배려를 받으면서도 제 욕심만 차리겠다는 건방진 태도에 얼마나 마음 상하셨습니까? 제가 모자라고 어리석었던 탓입니다.
이런 어린 저를 그래도 밉다 않으시고 이끌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진 시간을 선생님의 기대와 염려에 어긋나지 않도록 신중하고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제가 잘못하면 호되게 꾸짖어 주십시오.
맡겨진 일에도 공부에도 선생님의 제자답다는 평을 듣도록 부지런히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선생님의 건강하심과 학문의 성취, 그리고 좋은 시 보여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단기 4321(1988)년 1월 3일
구 영 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