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 조국’ 뛰어넘어 신명나는 새해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정호경 신부 엽서를 또 찾았다. 편지를 잘 안 쓰시는 신부님께서 두 통이나 엽서를 보내셨다. 상주 함창성당 주임신부로 계실 무렵이다.
글을 읽노라니 마치 살아계실 때처럼 당신의 표정,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몸짓을 생생하게 느끼고 실감한다. 인정이 듬뿍 담긴 정겨운 목소리도 떠오른다. 덧니를 살짝 드러내며 씨익 웃으시던 그 흔쾌함과 만족의 미소도 그대로 떠오른다.
엽서나 편지는 그래서 보물이다. 육신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실감을 느끼게 한다. 신부님은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었다.
풀, 나무, 키우는 강아지, 일, 농민, 노동자, 장애인, 사회의 밑바닥 약자, 핍박 받는 사람들, 북한동포 등등 신부님의 화엄적(華嚴的) 사랑의 방향성은 거의 광폭이고 무제한이다. 두 팔로 그 모든 것을 따뜻하게 껴안으신다.
내가 1991년에 시집 <철조망 조국>을 발간하고 보내드렸을 때 그걸 정독한 뒤 흡족한 소감을 엽서에 적어 보내셨다.
70년대 후반, 신부님이 나를 처음 만나 흩어지고 정돈되지 않은 한 청년의 정신을 제대로 수습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셨는데 세월이 지나 그 흐뭇한 결실을 보시니 속으로 얼마나 기쁘셨을까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신부님은 사람을 키우고 관리하는 목자(牧者)이다. 사람을 길러내는 농민인 것이다. 진정한 사목(司牧)이란 바로 그런 활동이다.
내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의 제목을 일일이 적어서 정성과 사랑을 표시하셨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신부님 묘소를 찾아 뵙고 술이라도 한잔 부어 올려야겠다.
+ 성탄
이동순 님
보고 싶습니다. 느긋한 응이도 아기자기한 단비도.
시집 “철조망 조국”을 고맙게 읽었습니다. ‘趙哥墓’, ‘산의 말을 엿듣다’, ‘쌍밤’, ‘통일꽃’, ‘북한감자’, ‘탕평책’, ‘시름에 잠긴 벗들에게’, ‘달과 철조망’, ‘철조망 세상’, ‘철조망 인간’, ‘건봉사’, ‘철조망 통과훈련’, ‘찔레꽃’, ‘철조망 조국’, ‘옻골 이모’, ‘순이’, ‘사람들’, ‘말더듬이 먹물’, ‘王哥正傳’, ‘앵무새’, ‘떨리는 붓으로’…. 좋던데요.
지난 달 13세에 어린 노동자로 시작해서 만 41년 동안 노동자로 살다가 차 사고로 앞서 가신 형님(정호갑 마테오) 죽음을 겪으며, 분단의 설움을 삼켰습니다.
부디 신명나는 새해를 빌며
1991. 12. 16
정호경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