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시인 47년 전 편지 읽으니 뜨거운 가슴에 왈칵 그리움이

김명인 시인이 늦게 군에 입대해 복무중인 이동순 시인에게 보낸 편지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누구나 온갖 힘든 일, 험한 과정을 두루 겪어왔으리라. 그런데 그것을 곰곰이 되짚어보면내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겪어내 지 않고 주위의 친구, 선배, 정인들의 각별한 염려와 걱정, 배려와 충고, 끊임없이 보내주는 격려와 부추김 속에서 비로소 힘을 얻고 어금니 깨물며 악전고투로 견디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두고 보더라도 사람은 결코 자기 혼자의 힘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 혼자서만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전히 착각이요 시건방진 만용이기도 하다. 흘러간 내 20대 중반,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다가 나는 뒤늦게 삭발하고 군복을 입은 신병이 되어 낙백한 심정으로 보내는 시절을 살았다. 한국의 청년으로서 그 누구나 감당해야 할 군 복무의 의무를 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던 학업을 한 번 중단하면 다시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그런 판단으로 군대를 자꾸 연기하기만 했었는데 그게 마침내 20대 중반까지 당도해서 마침내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다.

입영 날을 받아놓은 다음 착잡한 심정으로 전국을 터벅터벅 방랑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첫 행선지가 서울의 글벗들을 만나 약간의 위로를 받으려는 그런 심산도 있었다. 그 갑갑한 여정에서 시인 김명인 형은 동인들과 함께 한잔 술을 나누며 위로한 뒤 마땅히 잘 곳이 없던 나를 면목동 당신 댁으로 기꺼이 인도해서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용기와 격려를 주었다.

명인 형은 베트남전쟁을 다녀온 참전용사였다. 나보다 훨씬 가혹한 환경을 이겨낸 경험이 있었고 그 혹독함조차 시인은 시의 질료로 만들어야 한다며 몇 번이나 힘주어 말하고 타일러주었다.

얼마나 고맙고 도움이 되는 일깨움이었는지 모른다. 꼭 군대생활만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삶의 모든 역경이란 게 시인에겐 오히려 소중한 시적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말을 과연 누가 기꺼이 해줄 수가 있는가?

그 후 내가 군 복무 중일 때 명인 형은 다시 자상한 편지를 보내주면서 또 다시 그러한 자세를 잃지 말고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거듭 간곡하게 타이르고 전해주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읽어도 편지의 문맥들은 여전히 싱싱한 생명력으로 한 대목 한 대목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경북 울진 바닷가에서 출생한 김명인 시인은 파도소리를 가까이 들으며 자랐다. 시인의 생가를 직접 가본 적이 있는데 뒷방 창호지로 젖어드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명인 형에게 파도소리는 삶의 생기와 활력을 살려주는 원천으로 느껴졌다. 틈만 나면 성경을 소리내어 읽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들리곤 했다.

동해가 한 시인을 빚어내었고 그 동해가 시인을 품에 안아 젖먹이며 길러주었다. 김명인 시인에게 동해는 모태(母胎)였다. 멀리 떠나가서 살다가 기운이 빠지면 불현듯 생가로 허겁지겁 돌아와 동해의 파도소리를 가슴에 채웠다.

이렇듯 시인은 자신의 삶과 터전에서 시를 터득했고 시를 삶의 근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빚어낸 정결한 시작품이 다시 독자의 삶과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가 또 다른 작용을 하고 깊은 영향을 준다.

명인 시인을 만난 지가 오래다. 그가 보내주신 정겨운 옛 편지를 꺼내 읽으니 왈칵 그리움이 솟구치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추억의 힘은 이렇게 거룩하고 소중하다.

김명인  시인

동순 형

급사 아이한테 형의 엽서를 받아들고,
그곳 연병장의 군가 소리와, 통일화 끌리는 소리와,
꽉꽉 차 퍼져오를 땀내조차 전해오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날 뻔하였습니다.

불볕 따갑게 그을린 팔뚝, 그리고
군가에 목이 쉰 음성, 오히려 건강해진 모습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잃어버리고 던져버리는
우리들의 감상이라는 것을…
그러나 형이 꼭 이기고 있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김명인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모든 추락 속에 우리의 것들이 있고,
또 그곳에서 건져내는 것이 우리의 시이길
또 한번 부탁합니다.
많이 견디고 힘껏 받아들이고 보내세요.

그날 면목동 자정 이후로는 호승씨도 만날 수 없고
창완 형을 만난 지도 꽤 오랩니다.
김승희씨는 9월 초쯤 1년 간 예정으로
제주도로 갈 모양인데 지금 연락이 없습니다.
20여일 남짓 대학원 공부를 해서 모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9월부터 공부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이즈음은 통 시가 안 잡히고 조금 지쳤나 봅니다.
빨리 동해의 푸르름이라도 잡아
머리 속을 조금 씻어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방학이 내일 모랜데 방학이 시작되면
우선 바다부터 보고 그리고 열심히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하늘이 조금 흐려있다고 해서
비를 걱정할 수 없듯이
지금은 망설이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리고 ’73’ 제4집은 준비하려고 하는데
형의 작품을 아무래도 실어야 할 것 같아요.
꼭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언제 동인들 만나면 형의 이야기도 하며
즐겁게 놀다가 그 이야기라도 전해드리면
조금은 이곳 기분도 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힘들더라도 열심히 삽시다.
내일의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시를 위해서.
(쪼금 신파조 같지만 절실하니까)
그럼 틈나는 대로 소식 드리겠습니다.
건승 바랍니다.

1975년 7월 22일

金 明 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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