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님, 엽서 한장에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에서 일군 새 삶터에서 기르던 강아지와 함께한 생전의 정호경 신부. 강아지들은 정 신부를 식구처럼 따랐다고 한다. <사진 리북 제공>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옛 편지 뭉치 틈에서 참으로 반가운 필적 하나를 찾았다. 정호경 신부님이 96년 4월에 보낸 엽서다.

마치 신부님을 직접 대한 듯 반가움이 왈칵 일어나 잡고 쓰다듬지만 신부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돌이켜 보니 1976년에 처음 뵈었고 이후 안동 시절 3년 내내 나의 정신적 후견인으로 자리하셨다.

프란츠 파농, 파울로 프레이리 등의 책들을 한 아름 안고 와 내 하숙방에 와르르 쏟아놓으시며 무조건 읽고 느슨한 정신을 칼 갈듯 부지런히 숫돌질 하라고 하셨다.

이후 낯설고 생경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 삶의 허상과 뜬구름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내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동 시절 정호경 신부님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내 정신을 관리하는 조련사이자 개인교수였다.

신부님과 같이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분들을 만났다. 죽변 감리교회의 이현주 목사, 안동 임동초등 분교의 이오덕 선생, 봉화 상운면 구천리의 농민 전우익 선생, 안동 일직교회의 종치기 권정생 선생, 영해의 농민운동가 권종대 선생 등 경북 북부 지역의 여러 현자들을 두루 만나서 나를 소개해주셨다.

그분들과 같이 매달 독서회도 꾸려갔고 안동에선 처음으로 육사 시인 ‘문학의 밤’도 열었다.

비 오는 밤이면 한잔하자며 내 하숙집 골목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기도 했다.

그 정 신부가 어느 해부터 신부로서의 공식적 생활을 벗어나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에 땅을 구해서 직접 집을 짓고 연장을 갈무리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교구 사목활동, 본당 주임신부, 가톨릭농민회 전국지도신부 등의 외부활동을 일절 그만 두시고 농민이 되셨다. 입품은 그만 팔고 몸품으로 살아가시겠다는 뜻이다. 햇살에 검게 탄 얼굴로 헐렁한 베잠방이를 입으시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 모습이 어제처럼 선하다.

신부님은 틈틈이 나들이도 다녔는데 대구와 경산의 내 집에도 오셔서 하루씩 묵어가시기도 했다. 저녁밥상을 물리고 곧바로 술상을 차리면 술상 앞에선 그간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엄정한 검증과 비판과 성토의 시간이 시작된다.

현재의 월급과 명예에만 만족한다면 그건 개돼지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통렬한 질타를 내려주시기도 했다. 때로는 너무 매섭고 따갑고 혹독한 말씀에 거부감이나 반발심이 들기도 했다.

그 정 신부께서 언젠가 몸이 몹시 편찮아서 입원 중이라는 슬픈 소식이 들렸다. 폐섬유화증이란 희귀질환이었다.

기이한 것은 안동교구의 동기신부였던 유강하 신부도 꼭 같은 병으로 돌아가셨다. 며칠 전 전북 무주의 최종수 신부를 뵙고 왔는데 정호경 신부 돌아가시고 장례를 지낸 뒤 화장한 유골을 봉화 비나리 사시던 댁 주변에 직접 가서 한 줌씩 뿌리는 의식을 하고 오셨다고 들었다.

날이 갈수록 루도비꼬 신부님이 그립다. 신부님 친필 엽서 사진을 올린다.

정호경 신부가 이동순 시인에게

+평화
96. 4.19

귀한 책, 고맙게 읽겠습니다.
애쓰셨어요. 거창 ‘응이’, 단비, 단비 엄마도 씩씩하지요? 책이 나온 사진 보니 벌써 안인(?)처럼 보이는데, 역시 사진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겨울내 짬짬이 재목 마름질해서 지난달 19일 상량했고, 바닥공사(구들을 내 난생 처음 했는데 걱정이 됨-) 요즘 구들 놓는 이 없는 데다 기똥차게 고루 따뜻하면 여기저기서 구들 놓아달라고 부탁할 테니까…..) 끝내고 공사 일 시작했어요. 농사짓기 짬짬이 집 짓기 할 작정. 2년 동안 경칩 직후에 내 방을 찾던 개구리가 올해에는 아직 연락 없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