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 시인’ 김사인과 걷던 눈발 뿌리던 모스크바 중앙역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생각만 하면 그리운 사람이 있다. 시인 김사인(1956~ )이 그런 경우다.
편하고 부드럽고 잘 웃고 예의 바르지만 판단에 엄정하고 상대를 늘 먼저 배려하는 그런 점에서 김사인은 젠틀맨이다.
지금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하는데 그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해외 한국문학사 현장을 다니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그런 빛나는 활동의 시리즈였는데 모스크바 포럼의 주제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였다.
내 시집 <강제이주열차>가 거기 딱 맞았다. ‘아나톨리 김’ 같은 세계적 명성의 작가들과 같이 교감하는 시간도 좋았지만 눈 내리는 모스크바의 밤 뒷골목을 김사인 시인과 같이 걷는 시간이 더 행복했다.
외국어대 김현택 교수랑 김사인이랑 러시아 국방부 빌딩이 내다보이는 시베리아식 레스토랑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며 샤슬릭을 씹던 그 모스크바의 멋진 저녁을 잊을 수 없다.
그의 화법은 어눌한 듯 달변이며 바람부는 날 징검다리 건너듯 기우뚱거리지만 늘 핵심을 찾아가는 정확성이 있다. 눈발 뿌리는 그 기막힌 밤에 우리는 모스크바 중앙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너무 추워서 입술이 파랗게 얼었지만 그의 특유의 황소웃음은 그때도 입에 걸려 있었다.
송기원이 이런 김사인을 가장 부러워했다. 같이 여럿이 자리에 앉았는데 왜 여자들은 김사인에게만 유난히 심취하는지 나중에는 심취를 지나 도취해버리는지 그 비결을 몹시 궁금해하기도 했다.
이 엽서는 내가 가진 김사인의 유일한 필적이다. 작은 크기의 엽서 속에 하고싶은 말을 다 담았다. 그가 한때 실천문학 편집부에 있을 때 <친일문학선집>을 발간했는데 그 자료수집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신이다.
내용이 그대로 노출되는 엽서를 종종 쓰던 그 시절이 그립다. 오늘은 사랑스런 시인 김사인이 그립고, 눈길을 사각사각 밟으며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의 벽화를 만나러 가던 그 기막힌 시절이 새삼 그립다.
김사인 손엽서를 <아시아엔> 독자들과 공유한다.
그냥 엽서로 소식 드립니다.
책을 만들던 때의 자료들을 실천문학사에 와서 찾아보았더니, 지금 보내드리는 것들밖엔 남아있지 않습니다. 제 기억엔 <어동정>(김용제 시집), <보도시첩>(임학수 시집)은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 실천문학사 이사를 하면서 묵은 것들은 다 폐기한 듯합니다. 번역 역시 한 사람이 한 게 아니고, 번역 원고와 함께 자료도 돌려 받았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을 움직일 수밖에 없을 듯한 데 어쩌면 좋을지요. 저희도 일을 해보니 임 선생님께서는 자료에 대한 권리, 그에 대한 상당한 보상을 은연 중 기대하는 듯합니다.
필요하시다면 제가라도 임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송기원 형을 통해 잘 부탁을 하는 것도 좋을 듯하고요. 가부간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87. 12. 21
김사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