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늦가을, 먼저 떠난 제자 백창일 시인이 왜 이토록 그리울까?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백창일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1991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데뷔했다.
1998년 첫 시집 <나는 부리 세운 딱따구리였다>를 실천문학사에서 발간했고 4년 뒤에는 시와시학사에서 두 번째 시집 <모든 사랑은 첫 사랑이다>를 펴냈다.
1961년 전남 흑산도에서 태어나 힘든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내가 교편을 잡고 있던 충북대 중문과를 졸업했다. 시론, 문학개론, 현대문학사 등 내 강의를 타과생으로 신청해서 열심히 들었다.
다소 도발적 언사와 표정으로 교수를 불편하게 하는 질문을 툭툭 던졌다. 졸업 뒤로는 물론 소식이 끊어졌다.
그런 그가 1991년 시인이 되었노라는 기쁜 소식을 돌연히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때가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나는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받았는데 “선생님, 저 백창일이예요. 저 드디어 시인이 되었어요. 축하해 주세요. 모두 선생님 덕분이지요. 선생님께서 강의시간 제 가슴에 불을 붙이셨어요. 이후 저는 죽어라고 썼지요.”
“시의 샅바를 잡고 맞대결하자며 미친 듯이 미친 듯이 썼답니다. 선생님, 저 지금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살아요. 선생님, 뵙고 싶어요. 선생님,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몹시 술에 취해 숨소리까지 씨근거린다. 깊은 밤 느닷없이 전화통에 붙들려 거의 30분 가까이 격정적 발화를 쏟아놓는 그를 간신히 달래놓고 전화를 끊으면 잠은 천리 만리 달아나고 백창일에 대한 미운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는 소년시절 광주에서 5.18을 겪으며 격동의 현장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청주로 와서 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노동자 생활도 했던 것으로 안다.
등단 뒤로는 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왕성한 시작품을 계속했다. 시와 술과 고뇌가 그의 삶의 전부였던 듯하다.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은 어김없이 백창일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꼭 자정이 넘은 이슥한 시간이었다. 늘 술에 취해 있었고 길게 폭포수 같은 횡설수설을 늘어놓다가 마지막 화법은 꼭 “선생님 사랑합니다”였다.
어떤 때는 벨이 울릴 때 받기가 싫어 코드를 뽑아버릴 때도 있었다.
한번은 그가 경기도 양평 개울가에 참한 집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리곤 한번 놀러오라는 말까지 했다.
어느 날 집으로 두툼한 등기가 왔는데 열어보니 백창일의 친필 글씨다. 나에 대한 애정고백을 시로 써서 보냈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나는 멀리 부모산 자락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 얼마 뒤 백창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2007년 4월 2일에 세상을 떠났고 5월 20일에 고인이 직접 지은 집에서 마지막 49제를 올렸다고 한다. 자정이 넘은 시간, 일방적 애정고백을 쏟아내던 백창일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핑 도는 듯하다. 육신을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시를 쓸까?
백창일의 육필로 쓴 시작품을 찾아서 올린다.
창밖에 밤비소리가 투닥거리는 늦가을 새벽이다.
당신이 그리운 날에
-이동순 선생님께
앞산 솔숲에 해오라기떼 날아와 앉았습니다
저건, 푸른 숲 속 흰 새떼들이 아닙니다
당신입니다, 당신의 자유이자 당신의 꿈입니다
텁텁한 양평 막걸리 한 잔 들이키셨는지
구구대다 솟구쳐보다 푸른 숲 가지에 내리십니다
당신입니다, 영락없는 당신입니다
오, 당신은 저에게 푸른 눈빛을 주셨습니다
푸른 빛 속에서 찾아야 할 시의 길을 밝히셨습니다
푸른 숲 향기 속에서 시의 길을 알리셨습니다
앞산 솔 숲에 새하얀 해오라기떼,
제 육신을 흔들어주는 당신의 당부입니다
제 영혼을 일깨워주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나도 질 새라 재잘거리는 산새들 텃새가
한 세상을 이루고 딴 세상을 질책합니다
오, 당신은 앞산 솔 숲에 한 마리 해오라기로 와서
제 가슴에 청잎 하나 심어주고 느닷없이 떠나십니다
1995-6-21
사랑받고 싶은 제자 백 창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