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에 날 낳고 열달만에 부인 잃은 아버지의 40년전 편지

1959년 대구 서내동 시절 이동순과 부친(이현경)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113세가 되신다. 1908년 출생이니 윤봉길 의사, 나비연구가 석주명 등과 같은 해 출생이다. 소설가 김유정, 시인 유치환과 동갑이다.

일제의 수탈기관 동양척식회사가 만들어져서 본격적으로 가동한 해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반생은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살으셨다. 왜정 말기엔 일본 고쿠라로 가서 발전소 건설현장의 잡역부로 일하셨다.

독립운동가의 일곱 째 아들로 태어나 서양식 학교교육을 전혀 못 받았고 마을 서당에서 한글과 한자를 공부하셨는데 어느 정도의 학식을 갖추셨다.

성격이 단호하고 불칼 같았으며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이런 모습은 조부님 성격을 빼어 닮으셨다. 그 때문에 법정 송사에도 시달렸고 남의 모함이나 계략에 걸려 고통도 겪으셨다.

나이 마흔 셋에 나를 낳으셨고 불과 열달만에 아내를 멀리 떠나보내셨다. 배고파 우는 어린 핏덩이를 안고 동네방네 아기 낳은 산모를 찾아다니며 심 봉사처럼 젖을 얻어 먹이셨다. 말린 홍합을 갈아서 쌀가루와 같이 섞어 부드러운 암죽을 끓여 아기에게 떠 먹이셨다.

그때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아기는 자라서 소년이 되었고 아버지 품에 안겨 아버지 목 울대의 톡 뛰어나온 부분을 쓰다듬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걸 어머니 젖꼭지로 여긴 것이다.

아버지는 옛 시조 족자를 벽에 걸어놓고 잠들기 전에 한 줄씩 낭송하시며 아들이 따라 외우도록 읽어주셨다. 그리 자란 아들이 이 나라의 시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나이 여든 아홉에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그렇게 혼수상태로 한 주일 만에 떠나가셨다.

병상에 누워계실 때 야윈 손도 잡아보고 움푹 들어간 볼도 쓰다듬어 봤다. 어릴 때 만지작거리던 목 울대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이른 새벽, 병실에서 눈물이 왈칵 났다.

편지 스크랩을 뒤적거리다 보니 아버지의 편지가 한 통 눈에 들어온다. 1981년 1월에 쓰신 편지다. 오랜 만에 대하는 낯익은 필적이다. 무엇을 내가 보냈는지 모르지만 등기우편을 받고 잘 도착했다는 확인 편지다.

그리곤 아들, 손자, 며느리에 대한 건강을 일일이 묻고 확인하신다. 설날에 어서 만나게 되기를 기다리는 어버이의 심정도 포착된다.

아버지의 육신은 진토가 되셨을 터이나 그 사랑, 그 정성은 여전히 내 가슴 속에 불씨처럼 살아있음을 느낀다. 편지에서 말씀하시는 충북 사건은 충북대 교수 공채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다.

이동순 시인 부친이 생전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

東洵 개람(開覽)

너가 붙인 등기우편은 작(昨) 십일(十日)에 수령하였다. 연(然)이나 내용을 살펴보니 세 식구가 모도(모두) 감기로 병원에 단긴다(다닌다) 하니 앉아 듣기에 대단 걱정이로구나. 모쪼록 속히 치료하여 너희 내외와 응(鷹)이 놈과 세 식구가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간 응이 놈은 좀 컷는가 보고싶다. 빨리 회복되어 구정(舊正) 하에 건강한 모습으로 귀가 대면(對面)하도록 하여라. 이곳 부모는 그간 별고 없이 여전하고 감기도 다 떨어지고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안심하여라. 연(然)이나 여언(餘言)은 너희 내외가 어린 놈 데리고 무사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할 말 수다(數多)하나 이만 붓을 놓는다.

충북 사건은 어찌 되었는지 통지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궁금타.

1981년 1월12일

父 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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