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벽두 ‘동아일보 광고란’을 채운 사람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1974년 10월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언론사 대표들로부터 방위성금을 받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을 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도발을 앞으로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거의 공갈과 협박 수준이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즉각 대학을 중심으로 반유신 물결이 고동쳤다. 독재정부는 곧바로 대학휴교령을 내렸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사를 탄압했다.
74년 10월 하순 동아일보 기자 180명은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초순부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광고탄압을 실시했다. 회사간부를 앞세워 광고 동판을 빼앗아갔고 성탄절부터 광고해약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지켜본 독자들의 격려광고도 쏟아졌다. 동아 12월26일자 1면 중간 머리기사로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 보도와 함께 2개면에 걸쳐 백지광고가 나가자 편집국에는 엄청난 격려전화가 쏟아졌다.
성금을 내려는 독자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1975년이 밝자 국민들의 정치적 항의는 아예 ‘동아일보 광고란’을 통해 흘러넘쳤다.
단체나 공동명의는 물론 개인광고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분노와 성원이 일제히 광고란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동아일보 보는 재미로 세상 산다.”(서점주인·11일)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서울법대 23회 동기 15인 일동·11일)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 금반지 반돈을 놓고 가면서”(동아일보를 아끼는 한 소녀· 13일)
“이겨라! 동아.”(청담동 복덕방 장건장·14일)
“시장 길서 만난 우리들 빈 바구니로 돌아서며 조그마한 뜻 ‘거목 동아(巨木 東亞)’에 보냅니다.”(주부 일동·16일)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 거야.”
(이대 S생·18일)
“동아는 멋쟁이! 자기는 깍쟁이!”(숭덕중 졸업생 49명·18일)
“약혼했습니다. 우리의 2세가 태어날 때 아들이면 ‘동아’로, 딸이면 ‘성아’(여성동아)로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이묵李默·오희吳姬·20일)
“술 한잔 덜 먹고 여기에 내 마음 담는다.”(드라이브맨 안(安)·24일)
이런 격려광고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 ‘73문학그룹’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즉시 역사의 도도한 물결과 대열에 동참할 것을 제의했고 구성원 전원이 찬동을 했다. 이에 따라 약간의 광고비 성금을 모아서 동아일보에 찾아가 접수했다.
광고국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아무런 문구 없이 그룹 멤버들 이름만 실었다. 며칠 뒤 ‘73문학그룹’ 명의 백지광고가 실렸고 여기저기서 격려전화가 걸려왔다.
“참 잘 했다” “속이 다 시원하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 심정은 착잡했다. 공명정대한 언론은 늘 민중의 편으로 그 어떤 정치권력의 억압도 받지 말아야 하거늘 동아일보는 어찌 이런 수난을 겪는단 말인가?
세월이 흘러 오늘의 언론현실을 본다. 기레기, 가짜뉴스들로 넘치는 왜곡과 변조의 해괴한 현황을 지켜보노라니 당시 백지광고에 참여하던 뜨겁고 순정한 마음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