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장미여관으로’ ‘즐거운 사라’ 마광수가 그립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오늘은 특별한 인물의 필적을 올린다. 한 마리 광마(狂馬)처럼 시대의 광야를 질주하다가 스스로 절벽을 향해 주저없이 뛰어내린 다재다능했던 한 시인의 친필이다.
실제로 그는 ‘광마’라는 이름의 자호를 썼다. 1951년 경기도 화성 발안에서 태어난 마광수, 어려서 종군사진기자였던 아버지를 잃고 외로운 소년으로 자랐다.
서울로 이주해서 대광중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마쳤다. 박사과정 수료 직후 학위가 없는 상태에서 28세 때에 홍익대 사대 국어과 교수가 되었다.
1977년 대학시절 청록파 시인이었던 스승 박두진 시인의 눈에 띠어 문단에 이름을 알렸고 이후 차분히 시를 써서 발표했다.
홍익대에서 5년 세월을 보낸 뒤 모교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금의환향했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문단의 고질적 정체성, 공고한 섹트주의, 철벽 같은 체통과 형식의 중시, 위선과 이중성, 고정된 사고의 틀에 반발하고 깨어부시려는 상당히 위험천만한 대모험을 감행했다.
<광마집>, <귀골>을 비롯해서, <가자 장미여관>으로, <즐거운 사라>, <일평생 연애주의>,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등 다수의 시집, 소설집, 에세이집 등을 쏟아내었다.
내는 책마다 비판과 모멸의 시각이 퍼부어졌다. 대개의 흐름들은 문단의 엄숙주의, 과도한 이념적 편향에 대한 불편함과 불안감, 지배적 가치관의 위선과 허울, 혹은 그 이중성에 대한 반박이자 도발이었다.
당장에 매서운 비판과 혐오가 빗발쳤다. 보수 계열의 대표격인 이문열이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정계, 학계, 문단, 교육계의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어떤 경직된 교수는 마광수 이력에서 교수란 직책은 과분하다며 삭제를 주장했다. 몇 차례나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특히 가까운 동료교수들의 모함과 배척에 가장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다른 힘든 것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으나 동료교수들의 집단적 따돌림은 견디기 어려웠다. 불면과 외상성 우울증 따위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강단을 지키려 애를 썼고 거침없이 솔직한 강의와 가식없는 화법이 학생들로부터는 인기교수의 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11권의 시집, 8권의 문학이론서, 6권의 비평집과 4권의 문학 아포리즘, 39권의 소설집, 22권의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거의 폭포수를 방불케 하는 언변과 저서였다.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나 19차례의 전시회를 열었다. 연극학 전공 교수와 결혼했으나 5년 만에 헤어지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자신이 빚어낸 그 모든 고통의 멍에와 상처를 온몸에 밧줄처럼 수갑이나 족쇄처럼 둘둘 감은 채 마침내 2017년, 시대의 가파른 벼랑을 그대로 달려가 스스로 추락해버린 불우한 천재, 한 시대를 뜨겁게 달쿠었던 광마, 마광수란 이름도 이젠 기억조차 하는 이 없다.
그의 엽서 편지 글씨는 달필이다. 맵씨 있고 짜임새와 균형이 느껴지는 필체는 멋과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다. 20대 후반의 글씨로서는 드물게 세련미가 있다.
보내주신 시집(詩集),
너무나 감사히 받았습니다.
구절(句節)마다 넘치는 심상(心象)들이
무척이나 감동적(感動的)입니다.
호흡(呼吸)이 긴 시문장(詩文章)들이 또 좋았습니다.
더욱 문운(文運)이 빛나시기를 비오며,
우선 간단한 엽서(葉書)로
감사(感謝)의 뜻을 전(傳)합니다.
1980. 4. 29
마 광 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