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홍 작시 ‘독립의 아침’.. “탐욕의 모진 발톱 긁혔던 자리”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소설가,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향파 이주홍 선생의 생애를 생각한다. 1906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소년시절 서당에서 공부하던 중 거리의 기미년 독립만세 소리를 들었다. 이때 큰 정신의 각성을 받아서 서울로 갔다.
외로운 소년은 거리에서 껌과 인단을 팔며 공부의 꿈을 키웠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일본으로 건너가 그 꿈을 키우려했으나 현실의 벽은 높고 소년노동자로 가혹한 환경 속에서 심한 고통을 겪었다. 당시 노동자 체험이 그의 문학에 무르녹았다.
이 힘든 시간을 동시, 동화 등 글쓰기로 해소하며 자신의 뜻을 세워갔다.
맨처음 <신소년> 지에 동화를 써서 발표했고 1929년 조선일보에 소설 ‘가난한 사랑’이 뽑혀 문단에 화려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소년잡지 <신소년’, 시잡지 ‘풍림’, 잡지 ‘신세기’, ‘영화연극’ 발간에 힘썼다.
일제말 체포되어 감옥에 있던 중 감격의 8.15해방을 맞았다.
배재중학, 동래중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부에서 청년 맹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역사발전에 노동자와 농민이 주역이어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1945년 12월 <예술운동> 창간호에 시 ‘독립의 아침’을 발표했고 이 작품이 리베라레코드에서 음반으로 나왔다. 이주홍 작사, 김순남 작곡으로 테너가수 진예훈이 이 노래를 불렀다.
간악한 채쭉 밑에 울던 사십 년
얼어진 이 강산에 새봄이 왔네
탐욕의 모진 발톱 긁혔던 자리
평화의 새 꽃송이 웃으며 핀다
높이 들어라 자유의 깃발
크게 불러라 해방의 노래
-‘독립의 아침’ 1절 가사
분단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이주홍은 좌파 신념을 수정하고 온건노선으로 창작생활을 계속 이어간다. 1949년 부산수산대 교수가 되었으며 평생을 교직에 머물고 계시다가 1987년 세상을 떠났다. 별세 직후 3.1문화상을 받았다.
그의 호를 딴 향파문학관이 부산에 세워졌고 고향 합천에는 이주홍아동문학관이 건립되었다. 각종 시비, 문학비도 여러 개 세워졌다. 향파문학상도 해마다 수상자를 선정해서 수여한다.
2002년 1월, 나는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향파 이주홍 선생의 아드님 이창식씨가 보낸 것이다. 내가 당시 <월간조선>에 가요이야기를 매달 연재할 때 내가 소장하고 있던 이주홍 작사의 ‘독립의 아침’ 희귀한 음반 소개를 한 바 있는데 그에 대한 관심과 가사협조 요청이다.
해방 직후 발매된 잡음 투성이의 음반에서 가사를 채록해서 보내드렸을 것이다. 후손이 부친의 남긴 작품을 찾아서 정리하고 이렇게 애착을 갖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아주 갸륵한 아드님 모습에 감동했다.
우리 문학사에는 향파 선생처럼 굳은 진보적 사상이나 신념을 가지고 활동했던 문학인들이 적지 않았다.
신석정, 김광균, 김정한, 이주홍 선생은 역사의 진보적 발전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굳세고 단단하며 철저했다. 하지만 분단체제가 굳어지면서 마음 속 신념을 감추고 조용히 살아가셨던 것이다.
해방시기 좌파조직에서 발간한 잡지를 보면 신석정, 김광균, 김정한, 이주홍 선생의 격한 글과 작품들을 심심치 않게 대면한다.
역사현실에 대한 굳은 신념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면 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혼자 외롭게 그 신념을 지켜갈 수 없었으리라.
오늘 선생님께 이 글을 올리게 된 사연을 말씀드리오니 너그럽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해 ‘월간조선’ 11월호 예(例)의 난에서 선생님께서 소개하신 ‘독립의 아침’ 가요작사자 향파 이주홍의 4남2녀 중 둘째아들입니다.
부친께서는 고향의 군가(郡歌), 각급 학교의 교가, 각종 기념건조물 등에 글을 많이 쓰신 편이나 소개해주신 가요 가사가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뜻밖의 발견이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온 줄 아오나 선생님께서 불편함만 없으시다면 그 ‘독립의 아침’ 가사를 좀 알려주시면 해서 글월 올리는 바입니다.
예를 다하지 못한 무례인 줄 압니다마는 저의 입장을 이해하시어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바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2002년 1월
부산 해운대 이창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