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시인’ 스승 김춘수의 훼절과 제자 이동순의 ‘피눈물’

김춘수 시인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스승 김춘수 시인 이야기다. 그분은 대학시절 은사이시고 대학원 석사과정 지도교수이셨다.

흠모했던 만큼 곁에서 편모를 늘 보았다. 성품이 까다롭고 편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 외엔 말수도 적은 편이었다. 그분의 초기 시작품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맑고 그윽한 감성이 좋았다.

‘소년’, ‘기(旗)’, ‘구름과 장미’ 시절의 시집들, 하지만 ‘타령조 기타’부터는 ‘무의미시’라는 말이 등장하며 재미가 줄었다. 그 의미기피증은 점점 심해졌다. 의미가 형성되는 걸 시인이 일부러 막았다. 문명에 대한 시인의 반응과 태도라는데 나는 선뜻 동의가 되질 않았다.

김춘수

김수영과 비교해서 읽으면 더욱 싫어졌다. 수영은 의미와 격정적 대결도 하고 의미와 치열한 육박전도 불사하는데 김춘수의 시는 늘 의미를 에돌아가거나 비켜간다.

그 소극성 비겁성이 점점 싫어졌다. 그게 그분의 추천 제의를 거절한 이유이다.

스승은 석사과정 지도교수 시절 지역언론의 문화부 기자 L과 몹시 친했다. 먼저 식사 제의도 하고 극장 구경을 함께 가자고 전화했다. 그걸 옆에서 그대로 들었다.

그 기자는 내가 잘 아는 시인 아무개인지라 이런 모습이 나에겐 기회주의로 보였다. 일부러 언론에 환심을 사고 다가가려는 시인 그게 느껴지니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김춘수

대구 시절 김춘수 시인은 토박이 출신 신동집 시인과 내내 불화했다. 그래서 두 분을 따르는 제자群이 따로 형성되었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던 해 김춘수 교수는 영남대로 옮기셨다. 처음엔 숙명여대로 가신다는 소문이 돌더니 마지막 안착지는 영남대였다.

거길 가서 학장도 지내고 하시더니 1980년 5.18 비극이 발생하고 전두환 파쇼정권이 정권을 탈취하면서 곧 민정당이 결성되던 무렵 창당 발기위원 12인 명단에 들어갔다. 그후 민정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

손에 피를 묻힌 잔학한 정권 그 불법적 무리와 야합한 지도교수의 꼴을 더 이상 보기 싫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분과 작별했다.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분별을 잃은 것이다. 고결한 순수시인이 최악의 선택을 했다. 당신 자신은 어떤 인터뷰에서 앙드레 말로의 정치활동과 자신을 비유했다. 나아가서는 개헌문제가 떠올랐을 때 악법도 이미 제정된 법이라면 국민은 그걸 따를 의무가 있다고 강변했다.

이동순 시인. “손에 피를 묻힌 잔학한 정권 그 불법적 무리와 야합한 지도교수(김춘수)의 꼴을 더 이상 보기 싫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분과 작별했다”   

맑고 깨끗하던 시인의 이미지는 이미 현저히 손상되고 속물적 표상만 남았다. 민정당 국회의원 말기였으리라. 부산에서 초청강연을 하고 서울로 가던 길에 잠시 대구에 들러 옛 제자 몇을 부르셨다.

줄곧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나갔다. 숙소로 찾아가 뵈었는데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셨다. 그게 당신과의 마지막 만남이다. 별세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에도 나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뒤에 전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김춘수 시인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식사 중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변을 당하셨다고 한다. 너무 어이 없고 참혹한 일이다.

부인도 먼저 세상을 떠나신 뒤로 줄곧 혼자 아파트에서 사셨다. 가까이 있는 따님이 식사수발을 들었다. 통영 바닷가 출신이었던지라 워낙 좋아하시던 갈치찌개를 끓여놓았는데 그걸 아침 식탁에서 혼자 드시다가 그런 변이 나게 된 것이다.

김춘수

김춘수 시인이 그토록 심취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다는데 김춘수 시인은 생선가시에 변을 겪으셨으니 이 무슨 야릇한 운명의 조화였던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