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 모든 것이 먼저 간 이들의 몸이었다”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내 첫 시집은 <개밥풀>(1980)이다. 그 시집 맨 앞에 실린 첫 작품은 ‘서시’이다.
시집의 전체적 방향성, 또는 가치관을 암시했다. 죽음이란 게 단지 비통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의 이동, 혹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란 그런 생각에 대한 절실한 경험을 담았다.
장자(莊子)는 아내를 잃고 장례식에서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1979년 여름, 안동에서 한 대학생의 죽음을 보았다. 그 어머니의 가슴 찢는 통곡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그날 밤에 쓴 것이 ‘서시’란 작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살다가 때가 되어 홀연히 떠났던 것일까?
만약 죽음이란 게 없다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한반도에서 바글거릴까? 다행히도 죽음이란 게 있어서 우리의 터전은 적절히 정리되고 조정된다.
나도 일찍 내 어머니와 두 형을 잃었고, 나중에 나머지 가족들과 모두 영결했다. 옛 가족 모두 떠나가고 이젠 나 혼자 남았다.
내가 이룬 새 가족이 만들어졌고 나는 그 가운데 맨 위 서열이다. 나에게도 머지않아 죽음이 다가오리라.
내 나이 20대 후반, 어느 날 아침 밥상을 대했는데 밥상 위 차려진 모든 것이 먼저 돌아간 내 어머니, 형들의 몸이었다. 이승에 아직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 그분들의 몸은 내 밥상으로 옮겨와 계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니 삶이 새삼스레 소중하고 엄정하고 더욱 충실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이 땅에 살던 그 모든 생명은 일정한 때가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남아있는 생명이 더욱 잘 살아가도록 기회와 토대를 준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니 삶과 죽음이란 것이 아주 고맙고 숭고한 과정이라 여겨졌다.
죽음도 온갖 양식들이 있었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들이 많았다. 역사는 그 모든 것을 껴안고 도도하게 흘러간다.
내 시집 <개밥풀>의 첫 작품 ‘서시’를 작곡가 김진균(1925~1986) 선생이 읽으셨나보다.
김진균 선생은 ‘초혼'(김소월), ‘보리피리'(한하운), ‘또 한 송이 나의 모란'(김남조) 등의 대표곡이 있다.
‘서시’를 감명 깊게 읽으시고 작곡해서 대한민국가곡제에 출품했노라는 편지가 왔다. 물론 악보도 함께 보내주셨다. 노래는 따라부르기가 쉽지 않았지만 유명 작곡가께서 내 시를 공들여 작곡해주신 그 영광을 잊을 수 없다.
서시(序詩)
이 동 순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릎을 꺾고
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
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내려가고
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
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던 푸른 날들을
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
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
가쁜 숨 가만히 쉬어가고 있을까
이 아침에 지어 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
허공에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성난 목소리도 나직이 불러보던 이름들도
언젠가는 죽어서 땅위엣것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
대자연에 두 발 딛고 밝은 지구를 걸어가며
죽음 곧 새로 태어남이란 귀한 진리를 얻었으니
하늘 아래 이 한몸 더 바랄게 무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