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태일 51주기, ‘어느 시인의 70년대’

전태일 분신자살을 보도한 신문(오른쪽)과 그 한달 전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을 다룬 보도(왼쪽)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1970년부터 세태는 뒤숭숭했다. ‘오적 필화사건’으로 잡지가 폐간되고 11월엔 대구 출생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자 기본권 보장을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이 분신은 반독재와 민주주의 진보를 위한 거룩한 피눈물의 점화였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억압적 착취구조의 비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외로운 절규는 들불이 되어 번져갔다. 어둔 세상의 모순과 불평등에 저항하고 불의를 몰아내려는 신호탄이었다.

생전의 전태일(왼쪽)

1948년생 전태일은 17세에 서울 평화시장 피복공장 미싱사 보조로 일했다. 하지만 갈수록 가슴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때마다 청년노동자의 일기장엔 ‘절망은 없다 절망은 없다’를 반복해서 썼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려는 독재정권의 유일한 방법은 억압과 봉쇄 투옥과 유린, 감시와 통제뿐이었다. 그 전형적 대응은 파시즘 방식이었는데 이른바 유신독재의 강화였다. 일본 메이지 유신을 그대로 흉내낸 단순성과 치졸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의 발상은 오로지 일본근대사에서 해결방안을 찾았다. 질식을 강요하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비판과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 대학생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보다 강력한 유신체제 구축을 위한 통치이념의 설정과 준비작업이 있었고 얼빠진 어용학자들이 이에 적극 협조하였다. 일제말과 꼭 같은 현상들이 벌어졌다.

10월유신

드디어 1972년 가을, 그 악명 높은 괴물 ‘시월유신’이 발표되었다. 이 때문에 대학엔 위수령이 발동되고 모든 대학은 군인들이 둘러쌌다. 소총을 든 병사들이 교문을 삼엄하게 지켰다. 휴교령이 내린 대학의 문은 잠기고 캠퍼스 출입은 전면금지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몰래 잠입하고 싶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싶은 괴기적 반항심이 그때부터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의 옆쪽 울타리 허술한 담장으로 주변을 살피며 들어갔다. 이른바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는 게릴라식 잠입에 성공한 것이다. 캠퍼스는 텅 비고 괴괴할 정도로 적막했다. 나는 주변을 흘끔흘끔 살피며 대학 본관 옆 히말라야시다 아래 벤치 구석에 앉아 캠퍼스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대학이 이처럼 정적뿐인 시절이 있었던가? 이 강요된 침묵의 이유가 무언인가? 나는 왜 이렇게 혼자 캠퍼스 귀퉁이에 숨어서 이 슬픈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가? 나의 젊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던 한 순간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쏟아졌다. 평소 의기양양 걸어다니던 텅빈 캠퍼스를 어룽거리는 눈물 속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 다시 대학봉쇄령이 풀리긴 했지만 이번엔 날이면 날마다 유신철폐를 외치는 반독재 시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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