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오늘 분신 52주기, 2022년 노동자들 처지는?

아들 전태일 영정을 부여안고 울부짖는 이소선 어머니

52년 전 오늘(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 6가 평화시장에서 젊은 노동자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입니다. 대구에서 봉제공의 아들로 태어난 전태일은 생계를 위해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날품팔이를 시작했습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평화시장에서 미싱사 보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태일은 함께 일하는 어린 여공들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한창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태일이 일하던 손바닥만한 공장은 사람이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재봉틀이 놓여 있었습니다.

공장주인은 작업공간을 최대한 늘리려고 한 층의 공간을 쪼개 반으로 나눠 이층 작업장을 만들었습니다. 키가 작은 어린 노동자들도 몸을 낮추고 다녀야 했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공장 안은 늘 옷감 먼지가 가득 차 있어서 기침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공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해야 했습니다.

바쁠 때는 더 늦게까지 남아서 일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돈을 벌었지만 하루 세끼 밥을 먹기에도 빠듯한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전태일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모두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하여 굶는 일이 다반사였을 겁니다. 그런 여공 시다들이 안타까워 전태일은 자신의 차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다 주곤 했다고 합니다.

쫄쫄 굶어가면서 하루 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착취당하는 현실을 보고 전태일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모임 이름은 ‘바보회’라 지었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태일은 이렇게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습니다.

그의 어머니(이소선 여사)는 전태일이 생전에 요구했던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청계피복노조’를 만들도록 허용하고, 노동자들의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일요일 휴무를 보장하라는 등의 요구였습니다. 결국 당국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장례식은 20일 뒤에야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70년대 한국노동운동의 상징 청계피복노조가 11월 27일 출범했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평생을 노동운동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될 때 청계 6가 ‘버들다리’에 전태일 동상(반신상)이 세워졌습니다. 임옥상 화가의 작품입니다. 버들다리는 청계천 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전태일 40주기인 2010년 ‘버들다리’ 이름을 바꿔 달라고 많은 시민들이 릴레이 1인시위를 벌였습니다. 마침내 서울시가 요구를 받아들여 ‘전태일 다리’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자 처지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전태일 52주기인 2022년 현재도 노동자들 처지는 그대로입니다.

아니 더 후퇴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하고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고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윤석열 대통령의 노동관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인들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키는 나쁜 법이라 생각하는 윤 대통령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 기조는 노동시간규제 완화, 임금체계 개편, 자율중심 안전관리체계, 공정한 노사관계 구축 등입니다. 결국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위험한 노동환경’을 방치하겠다는 정책입니다. ‘기업이윤 극대화’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자는 정책입니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날은 언제나 올까요. 정말 답답한 전태일 52주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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