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나그네 43년 안병준③]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이라면···

평생을 인권보호에 바친 조영래 변호사(오른쪽)와 그가 변호를 맡았던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씨(왼쪽, 현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서울신문에 대한 조영래와 권인숙의 시선

[아시아엔=안병준 한국기자협회 전 회장, <서울신문> 정치부장, <내일신문> 편집국장 등 역임] 1987년 3월. 나는 서울신문 부근 다방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씨를 대동하고 온 고 조영래 변호사를 만났다. 당시 39세인 조 변호사는 전태일 분신 사건, 첫 집단소송인 망원동 수재민 사건, 상봉동 진폐증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 등으로 ‘인권 변호사’ 칭호를 얻고 있었다.

1986년 말 법정에서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명변론으로 석방을 끌어내고 잔무 처리를 위해 찻집에 왔던 것이다.

‘조변’(조 변호사의 약칭)이 서울대 법학과, 내가 경희대 치의예과를 다닐 무렵부터 우리는 20년 넘게 친구였다. 조변이 제안하고 내가 찬성해 그의 동생(명지대 공대 교수)과 내 여동생(소설가)이 결혼해 지금도 잘 살고 있다. 그와 나는 사돈 사이가 됐다. 나는 짬짬이 서소문 그의 사무실에도 갔다. “어이! 병준이, 이리와 같이 앉지”

우리는 함께 인사를 나눴고, 조변은 권인숙씨에게 나를 ‘서울신문 기자’라고 소개했다. 인사 후 나를 바라보는 권씨의 시선이 곱지 않음을 느꼈다. 당연했다.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가명으로 노동현장에 취업한 대학생들을 ‘운동권 혁명가’로 취급했다. 당국이 발표한 대로 기사를 썼다. 당시 언론은 권씨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은 권씨에 대해 다른 신문보다 더 비판적이었다. 권씨의 반론은 없이 거의 경찰 발표를 그대로 기사화했기 때문일 터였다.

커피 맛이 더욱 쌉싸래했다. 조변도 눈치를 챘다. 그러더니 ‘안병준 기자’ 를 변론했다. 짧은 한마디였다. “서울신문에도 병준이 같은 사람이 필요해!” 조영래 변호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권씨의 시선이 달라졌다. 쓰디쓰던 커피 맛이 달보드레해졌다. 돌이켜보면, ‘서울신문의 반란’은 묘하게도 격동기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와 6월 항쟁을 포함한 ‘노태우의 6·29 직선제 선언’의 중간 시점에 위치하게 됐다.

필자는 1975년 12월부터 1년간 월간 <세대>에서 기자로 일하다 1977년 서울신문 공채로 늦깎이 기자가 됐다. 사진은 1979년 7월호 표지


잡지사에서 신문사로 옮겨온 늙은 기자

나는 서울신문에 오기 전인 1975년 12월부터 1년간 잡지사 기자를 했다. 월간 <세대>(世代)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함께 일한 인사 몇몇이 저 유명한 <사상계>(思想界) 대항마로 창간한 잡지다. 잡지사는 신출내기인 내게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접근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상대로 한 원고 청탁과 인터뷰 등이 주 업무였다. 오히려 편했다.

대학 졸업 후 몇몇 일간지 기자 시험에 응시했으나 고배만 마시던 서른 살 때였다. 월간 <세대> 기자로, 조선일보 1973년 신춘문예에 <방생>(放生)으로 등단한 소설가 손용상과 당시 유정회(維政會)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있던 고교 친구 정지태가 힘을 써줘 월간 <세대>에 들어갔다. 1976년 10월 결혼했는데 잡지사는 12월에 문을 닫았다. ‘백수 신혼부부’로 두어 달 놀고 있는데 1977년 봄 경희대 대학주보사 주간인 이광재(李光宰, 전 경희대 부총장, 전 언론학회 회장)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신문에서 수습기자 뽑는다는데 응시할 생각 있느냐? 생각 있으면 학교에 들러. 추천서 써줄 테니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학교로 달려갔다. 교수께서는 추천서에 서명해주기 직전 내게 또 물었다. 1976년 2월 졸업 당시 했던 질문이었다. “학교에 남아 교수의 길을 갈 것이냐, 언론의 길을 갈 것이냐?” 나는 똑같은 답변을 드렸다.

“거친 벌판으로 나가겠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언론사의 시험과목은 영어·상식·논문·면접으로 모두 비슷했다. 필기시험 후 당시 서울신문의 이우세(李禹世) 편집국장, 남재희 (南載熙) 주필 두 분의 최종면접을 거쳐 수습 21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88년 4월 18일 서울신문 노조 창립 현판식. 오른쪽이 안병준 초대 위원장


서울신문 초대 노조위원장 맡아

1988년 4월 13일 새벽. 명동 YWCA 강당에서 서울신문 노동조합이 창립됐을 때 나는 후배들에게 등 떠밀려 초대 노조위원장이 됐다. ‘5·18 선언’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입사 11년차일 때였다. 노조 활동은 항상 뜨겁게 마련이다. 우선 조직 구성을 마치고, 공정 보도와 편집국장 직선제 등 단체협약 과제 선정을 마무리지었다. 사측과의 단체협상을 앞두고 파업 결의까지 해두었다.

노조 창립 훨씬 이전에 서울역 앞 금강아파트 이른바 ‘비트’에서 전설적 노동전문가인 장명국(張明國, 현 내일신문 사장)씨, 김금수씨 등 노동 전문가들로부터 특별 비밀교육을 받았다.

뜨거운 6~7월 들어 노사는 새벽 회의까지 강행하는 지루한 단체협상을 진행했다. 나는 6개월 전 받은 허리 수술로 복대를 차고 있었다. 에어컨은 가동되고 있었으나 등허리에 땀이 줄줄 흘렀다. 당시 사측의 이한수 사장은 편집국장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 김종림(金鍾林) 상무이사는 경희대 법대 졸업생으로 우리는 법 전문가 들을 상대해야 했다. 협상 최대 걸림돌은 공정 보도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편집국장 직선제였다.

이전까지의 서울신문 상황으로 보아 그 두 가지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파업에 돌입하면 ‘공권력 즉시 투입’이라는 인식이 기정사실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파업까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측 고위인사와 비밀 접촉을 했다. 나는 “공무국 판매국 등 블루컬러에 대한 획기적 후생 복지책을 제시하면 편집국장 직선제를 임면동의제로 양보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 중간에 부산중학교 선배로서 청와대 고위인사인 최모씨를 세종로 한 골목에서 만났다. 그는 서울신문 노조의 파업 결의를 알고 있었다.
“어이 미스터 안, 서울신문이 파업에 들어가면 그 즉시 공권력이 투입될 거요. 개인 기업인 다른 신문하고 달리 정부 기관지잖아?”

헤어질 때 그는 내게 ‘다른 뜻 없다’면 봉투 하나를 주려 했다. 그 순간 노동조합 교육 때 강사가 강조했던 “먹으면 약해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세 번이나 사양했다. “취재원 대 기자 관계가 아니라 중학 선배로서 주는 것이니 그냥 후배들이랑 저녁이나 하시게나”라고 말해 받아 넣었다. 나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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