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남재희 “나는 데꾸보꾸여”…욕먹는 거 겁내지 말라는 ‘죽비’
[아시아엔=이광호 <노회찬평전> 작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저녁 남재희 장관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미적거리다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이제야 고인을 추모하며 몇 글자 적어본다.
2000년대 초반, 나는 당시만 해도 ‘듣보잡’이었던 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주간 <진보정치>를 만들고 있었다. 그 즈음 어느 날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국장에게 전화가 왔다. 남 장관이 한번 보자 하시니 나오라는 거였다. 좌우남녀노소 불문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술자리를 즐기던 고인이 종종 만나는 기자들 모임에서 박 국장이 지침을 받은 거였다. 뜻밖의 초청이 반갑고, 보자 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당시 노풍(勞風)을 최대한 일으켜 선거(2002년 지방선거와 대선)를 치르려던 민주노동당은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관지 <진보정치>는 특집 등 다양한 형태로 이 의제를 다뤘다. 관련 기사를 읽어보던 남 장관이 편집책임자였던 나를 부른 것이었다. 기획과 논조에 대한 평가와 격려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코로나 이전까지 이어졌다. 코로나 끝나면 한 잔 하자고 하셨는데, 그럴 기회를 만들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장서가이자 다독가로 유명한 남장관은 여러 종류의 정기간행물도 구독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부터, 미국과 한국의 신생정당 기관지까지 꼼꼼히 읽는 분이었다.
어느 해 설 연휴에는 내게 전화를 해서 월간으로 나오던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 실렸던 누구누구의 어떤 글이 이러저러 해서 좋았다고 품평했다. 그 얘기를 하기 위해 명절 연휴에 전화를 한 거였다.(미국 잡지의 정기구독 여부는 확인이 안 됐는데, 내게 그 잡지를 건네줬던 기억은 있다. 프랑스 잡지 <보그>의 카트린느 드뇌브 특집판도 받은 기억이 있다)
남 장관과의 만남이 시작된 초기에 나는 신문기자에서 박정희, 전두환 시절 여당 국회의원, 김영삼 정권에서는 장관을 지낸 일과 노동운동이나, 좌파 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는 행동 사이에 있을 것 같은 맥락적 일관성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짧은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나는 데꾸보꾸여.”(울퉁불퉁, 올록볼록, 요철 형태를 말하는 일본어)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 장관은 <진보정치> 기자들을 불러 그의 단골집인 광화문 교보건물 뒤쪽에 있었던 ‘감촌순두부’ 집에서 소주를 사주기도 했고, 자신의 지역구였던 강서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후보를 도와주기도 했다)
남 장관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면 후배들에게, (본인 기준으로) 맞춤형 책을 몇 권씩 나눠주곤 했다. 그런 책이 우리 집에도 족히 20권 가까이 된다. 한글로 읽어도 어려울 외서부터 E. M. 포스터의 소설, 자신의 지역구에서 나오는 <강서문학>까지 실로 다양했다. 국내에서는 번역이 안 된 을 주시며 내게 읽어보라 했는데, 난 그때 막스 이스트만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국내에서는 번역이 안 된 <The Last Romantic – a life of Max Eastman>을 주시며 내게 읽어보라 했는데, 난 그때 막스 이스트만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아직도 그 책을 안 읽어서 그가 누군지 잘 모른다. 구글 검색을 통해 아는 정도다.
<강서문학>, <황해문화> 등 본인의 기고문이 실린 책을 꼭 집으로 보내주는데, 원고를 정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외 없이 원고에 대한 질문이 전화 등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약간의 긴장 속에서 통화를 하곤 했다.
기억나는 많은 일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종인씨가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을 때, 공개적으로 그를 강도 높게 비판했던 ‘사건’이다. 남 장관은 젊은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김종인을 알고 지냈다. 김종인보다 나이가 많은 남 장관은 ‘경제문제의 대가’인 김종인과의 술자리는 언제나 ‘학술세미나’처럼 된다고 했다.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불리는 헌법 제119조 2항을 ‘김종인 조항’이라고 이름 붙인 이도 남 장관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남재희-김종인이 함께 하는 술자리는 둘 플러스 다양한 조합이 있을 정도로 빈도가 잦았고, 참여 멤버도 다양했던 것 같다. 나에게도 몇 차례 그런 자리가 있었다.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아주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내게 김종인씨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놀라웠다.
이번에 조문 갔을 때 둘째 따님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당시 남 장관의 구술을 받아 적고 있던 사모님께서도 구술 내용을 듣고 깜짝 놀라셨다고 전한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나는 남 장관께 영화 제목을 흉내 내서 “남재희의 시간은 왼쪽으로 가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대답이 어땠는지는 기억에 없다. 세상이 오른쪽으로 가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고, 구태여 왼쪽 오른쪽 가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왼쪽과의 친연성을 보여준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의 힘이 없어진 이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한 국가나 사회의 민주화 정도는 현실 권력을 구성하는 정당(정파)들 간 합의 수준과 연관돼 있다. 그 수준은 공존의 범위와 연관된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보통선거’는 최소 합의 수준이고, 공존의 근거다. 좌파 우파 정당의 경쟁체제에서는 ‘복지국가’도 합의 수준이고, 공존의 내용이다. 하지만 수준과 범위는 끊임없이 유동한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비가역적으로 확보됐다고 여겨지던 시스템 일부가 현 정권에 의해 유실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우리의 경우 거대 양당의 합의 수준은, 그 바탕에 국민들의 여론이 깔려 있겠지만, 충분히 넓고 깊지 않은데, 게다가 퇴행적이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보통선거에서 복지국가까지 넓히지 못했다. 남재희는 우파 또는 보수정당 편에 서서, 민주주의의 합의 수준, 경쟁하는 정파와의 공유 면적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실천했던 정치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전두환 정권 시절 학원안정법을 반대한 일, 전국기관사협의회(전기협) 파업과 관련 ‘제3자개입금지’ 조항 위반으로 재판을 받던 권영길 편에 서서 전직 노동부 장관으로 증언을 한 일,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공권력 투입을 국무위원 중 유일하게 반대한 일, 약간 확대 해석하면 국방위 회식 때 장성급 정치군인들을 향해 술잔을 던진 일 등이 그런 실천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 위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래 글은 ‘남재희 회고-문주 40년’이라는 문패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연재된 글 중에 일부다.
“40대 말까지의 주량은 엄청났다. 그때 선거에 출마해서는 회식이다, 초상집이다 하고 돌아다니며 하루에 2홉들이 소주 4~5병씩을 매일 마셨다. 백일쯤 그렇게 마시니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좀 부은 듯하다가 저녁이면 가라앉고 다시 술이 들어간다. 그렇게 마셔댄 선거전 백일이 몸에 금을 가게 했다. 술 실력이 2~3병쯤으로 줄었다. 그리고 70이 가까워지면서 1병이 적정량이 되고, 간혹 1병 반을 무리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음 맞는 젊은 패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 자제를 잃고 2병이나 또는 그보다 약간 더 마시고 만취하여 다음날 후회막급이게 된다. 주간지 <진보정치>의 이광호 편집위원장 등과 술을 할 때 아슬아슬한 고비까지 간다. 인터넷 뉴스 <프레시안>의 이근성·박인규씨 등 간부와 만나면 으레 내가 기분이 들떠 과음하게 된다.”
내가 이 대목을 인용한 이유는 내 이름이 언급됐다는 점과 함께 ‘70이 가까워지면서 1병이 적정량이 되고, 간혹 1병 반을 무리하는 경우도 있다’는 구절이 눈에 팍 꽂혔기 때문이다. 21년 전에 쓴 글이다. 이제 그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70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 나는 아직도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 (빈소에서도 30분 만에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캔을 혼자 후루룩 마셨다)
남재희 장관님, 귀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